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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Sep 30. 2017

아버지의 조건

[아이보고 영화보고] 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리뷰

전에 후배가 말했다. 어릴 적 상처가 많아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그러면서 어린아이랑 뭐 하며 노느냐 묻는다. 마땅히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말도 안 통하니 답답할 것 같다면서.     


나는 아침마다 달려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아들 녀석을 보면 어릴 적 내가 먼 과거에서 달려와 그때 그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나랑 똑같은 사람이다 보니 굳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다. 아들 녀석이 두세 살일 때도 나를 바라보면 대부분 바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해주면 알아들었느냐는 듯이 만족스럽게 웃고 또 어딘가로 달려간다.      


그런데 아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 곧 어릴 적 내가 채워지는 것 같다. 아들에게 잘 해주면 잘 해줄수록 내가 보상받는 기분이다. 아물지 못한 채 깊숙이 그대로 숨어 있었던 어릴 적 상처들은 이제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녀석과 함께 있다 보면 신기하게도 치유의 손이 그곳까지 미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주는 것 이상으로 돌려받는다고 하는데, 이건 돌려받는 느낌이 정말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다. 그래서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나 자신도 자라게 한다. 어릴 적 어떤 이유로 성장을 멈춰버린 영혼의 한 부분이 기운을 차리고 기지개를 켜고 한 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아이를 키움으로써 스스로는 어른으로 키운다. 그래서 그 후배에겐 어릴 적 상처가 많다면 오히려 자식을 가져보라 권하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신비한 일이 있을까? 다른 개체를 이렇게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또 다른 개체에 전적으로 잘 해 주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심리적 장벽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어릴 적 나를 소환하는 마법은 어떻게 가능한가? 답이야 분명하다. 유전적으로 나와 가장 가깝기 때문에 아닌가? 제 얼굴을 닮았다는 건 생각보다 어마 어마한 일이다. 관계가 견고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 2013)는 자식이 뒤바뀐 가족의 이야기다. 료타-미도리 가족은 잘 나가는 아빠와 다정한 엄마, 말 잘 듣는 아이로 구성된 모범적인 중산층이다. 료타는 어느 날 여섯 살 아들 케이타를 낳았던 병원으로부터 지금까지 키워온 아들이 친자가 아니며 병원의 실수로 태어났을 때 아이가 뒤바뀌었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 아닌가. 료타와 미도리는 그날 밤 자신과 핏줄이 섞이지 않은 아들을 갑자기 낯설어하며 어딘가 있을 내 자식에 대해 떠올렸을 거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 모두 보고 난 뒤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보고 나선 한동안 잠이 들지 않았고 두 번째 봤을 때는 하루를 서성이듯 지냈다.     


처음 본 날은 마음 편히 한 주를 마무리하고 싶은 어느 일요일 밤이었다. 무심히 TV를 틀어 영화를 고르는데 그저 따뜻한 가족 영화거니 싶어 이 영화를 골랐다. 그런데 나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멱살을 잡힌 듯 이야기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엄청난 감정 소모를 준비해야 했다. ‘잘 못 걸렸구나...’ 싶었는데 발을 빼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이 영화는 로그 라인만 보면 매우 선정적이고 통속적이다. 일일드라마처럼 흔하지만 일단 보면 빠져나오기 힘든(결말을 봐야 마음이 풀리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진부함에 저항하면서도 적당한 갈등 뒤에 찾아올 뻔한 감동을 서둘러 찾고 싶었다.


다른 관객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철저히 료타의 감정을 따라갔다. 그것이 남자의 본성, 태도를 대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자라면, 아버지라면 나도 저러지 않았을까? 매번 료타의 행동에 수긍이 갔다.    

사실을 안 후 료타의 입장 정리는 빨랐다. 료타는 병원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역시 그랬던 거군’이라고 거칠게 내뱉는다. 유난히 승부욕이 강한 아버지에게서 이렇게 유약한 아들이 태어났을 리 없을 거라 생각해 왔던 터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남자는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우선 바뀐 자식을 계속 키울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원상복구 해야 한다. 더 긴 시간이 아이들에게 남았으니 그리 해야 한다. 제 자식을 키우고 있는 유다이-유카리 가족들을 만나보니 판단이 하나 더 선다. 그들의 가정환경을 보니 형편이 좋지 않다. 그러면 내가 부담을 안더라도 내 울타리에 아이들을 둬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되면 남자들의 게임이 되는 걸까?’ 나는 영화가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자리를 고쳐 앉았다.     


료타가 보기에 어수룩한 유다이를 설득하는 게 어쩌면 불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을 테다. 자존심만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더 좋은 환경을 아이들에게 주자고 설득하면 자기 고집만 피우진 않겠지?     

영화를 보는 나도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리되면서 전투적인 자세를 취한다.     


료타, 능력을 발휘할 때다....     


어설프게 인간적인 모습을 취하느니 모양새가 나쁠지라도 이성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게 필요할지 모른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고 어려운 숙제를 한동안 풀고 있으려니 피곤하기까지 했다.    

중반부터 두 가족이 친자들과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 길고 자세히 그려진다. 그리고 끝내 혼란스럽지만 료타는 자식을 바꿔 친자를 키우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 이른다. 여러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두 장면이 머리에 각인된다. 첫 번째는 료타가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다. 아버지는 ‘케이타는 점점 유다이를 닮아갈 것이고 료타의 친자인 류세이는 점점 료타를 닮아갈 것’이라 말한다. 피는 그렇게 진한 것일까? 꽤 독선적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말에 거부감도 들지만 그 말이 마음에 진하게 남는다.     

두 번째는 아버지의 날. 케이타는 료타에게 종이꽃을 선물하지만 그 동안 주말마다 만나 친해진 유다이를 위해서도 꽃을 만든다. 본능일까? 이 녀석 제 아버지에게 마음을 주고 있구나...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겠지? 료타는 결심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강행은 불가피하다. 료타는 아들에게 이제 유다이네에 가서 살라고 하며 이제 그들에게 아빠, 엄마라 말하라 한다. 그런 말을 하는데 최선의 방법이란 없다. 그저 담담하게 관철해나갈 수밖에 없다.     

만약 낯선 아이가 내 자식이라고 우리 집에 온다면 아버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정이야 천천히 드는 것이고 우리 집에 어울리는 사람이 우선 되어야 하지 않을까? 료타는 ‘새로운 진짜’ 아들에게 이전 집에서 살았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살아갈 규칙을 배울 것을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가르친다. 한량 같기도 하지만 친근한 유다이 집에 간 케이타는 그럭저럭 적응하는 듯하지만 료타의 친자 류세이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엄격한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류세이는 집을 나와 유다이 집으로 도망을 간다. 료타는 그 순간 자신이 졌다고 생각한다. 엄한 아버지는 친구 같은 아버지보다 못 한 걸까? 그래도 류세이를 붙잡으려면 뭐라도 해야겠고 방법이란 게 조금 더 친근한 부모가 되자는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류세이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 료타는 조금은 달라지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류세이와 친해지기 위해 캠핑도 하며 애를 쓰지만 새로운 아들의 마음을 열기는 쉽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류세이가 서운하기만 하다.    

고군분투하고 있던 어느 날 자신의 카메라에서 예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넘겨보던 료타는 케이타가 찍어온 료타의 사진들을 보며 망연자실한다. 자고 있고 일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들. 아들은 바쁜 아빠와 놀고 싶었지만 곁이 없었다. 보는 나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다. 새로운 아들과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상황에서 만난 옛 아들의 마음.    

영화는 자기 자식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건 결국 함께 한 시간이 적어 그랬다는 역설과 자기 자식이어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남과 같다는 두 개의 역설이 이중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앞의 아이러니가 감동의 진앙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 누구든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산다면 진짜 아들이라고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후자는 그 시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묵직하게 전해주면서 전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심도를 더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저 헤어졌다 다시 만난 부모 자식이 서로 다가가는 이야기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곳까지 건드리고 있다.

인공 숲이 자연 숲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최소 15년은 걸린다는 료타의 깨달음은 자연 숲도 비 내리고 바람 불고 햇살이 내리지 않으면 죽어간다는 깨달음이 합쳐져 큰 울림을 준다. 제 자식과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듯 남과 가까워지는데 한계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는 영화를 한참 보다 뒤돌아보니 료타를 너무 많이 따라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남자니까 의례 저러지 않겠나 생각하면 따라갔는데 도착한 곳은 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 생각해보니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친해야 한다는 건 뜻밖의 말이다. 결국 엄한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라 무심하고 방관하는 아버지가 문제라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두 번째 영화를 볼 때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혈연만큼 중요한 건 시간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화를 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생각보다 일방적으로 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쪽을 모두 균형 있게 볼수록 후반부의 반전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뜻밖에 힘을 잃는다.


내가 왜 감동했었지?...    

케이타의 입학식 날 유다이는 료타에게 자신의 친자에게 류세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아이는 케이타라는 이름이 꼭 어울리는 아이로 자랐다고 말한다. 유다이는 료타에게 부모자식간의 관계에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닌가 묻는다. 료타는 엄마를 버리고 새로 결혼한 아버지를 미워한다. 어느 날 아버지를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케이타가 점점 료타와 외형적으로 멀어질 것이라 말한다. 한편 료타의 양어머니는 살다 보면 닮아가는 게 많다며 부부도 서로 닮아가지 않느냐 한다. 모두 기른 정을 지지하는 전개다.     


왜 이런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다시 보니 놀랍다. 애당초 영화가 만든 트릭에 넘어가 감동을 받은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살펴보며 보면 될 일이었다. 그저 일을 해결하겠다는 강박감이 균형감을 잃게 했다. 그렇게 아버지들처럼 생각하며 길을 잃었던 거다. 영화에선 엄마들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케이타의 엄마 '미도리'는 일본어로 녹색이라는데, 여성들을 관계의 원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건 아닐까? 그리고 보면 극 중 존재감은 적지만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다.   


‘어릴 적 누가 이렇게 해주면 좋아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그걸 아들에게 해주면 아들 녀석 매번 좋아한다. 아들 얼굴을 보면 무엇을 열망하는지 느껴진다. 아들과 소통하기는 정말 쉽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만만한 기분이 여지없이 꺾일 때가 생긴다. 바로 한동안 바빠서 얼굴을 못보다 오랜만에 대면하는 순간이다. 도대체 뭐를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떼를 쓰고 울어버리면 좌절한다. ‘어 이게 아닌데...’ 피를 나눈 부모 자식이 된다는 건 귀한 기회이지 결과는 아닌 셈이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남의 자식들도 아끼게 된다. 시간을 들여 가까워질 시간이 부족할 뿐이지 어느 누구도 내 자식처럼 가까워질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육을 통해 아버지가 되고 또 사람이 된다.   



이번 편은 매거진 <감독의 눈으로 보는 영화 리뷰>에 올렸던 글입니다. 연재 매거진에 육아 관련 영화 리뷰들을 담고자 하여 이전 글을 다시 소개했습니다. 다음 주엔 영화 <콘텍트>를 육아 관점에서 풀어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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