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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Oct 14. 2017

아빠는 펜스맨

안전사고 대처 어떻게 할까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

최근 어느 법조계 부부가 해외에서 쇼핑 때문에 아이를 장시간 차에 방치했다 체포되었다. 사회 지도층 몰상식한 일로 망신을 당했다는 점이 부각되곤 있지만, 아이들 안전에 둔감하여 벌어지는 사고 뉴스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 홀로 있던 7세 아이가 화재를 피하지 못해 사망하기도 했다. 외국에서는 어린아이(나라마다 규제 기준이 다른데 적게는 8세, 많게는 16세)를 혼자 두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제 이런 제도가 들어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모 입장에서 이런 뉴스를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즉각적으로는 무심한 부모에게 분노하지만 한편으로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해왔나 생각해 본다. 아이를 카시트에 두고 빵집에 얼른 들어가 식빵 하나 사 들고 나오는 건 괜찮지 않을까? 마트에서 물 하나 사려고 아이들을 줄줄이 내렸다 타게 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어디 멀리 가려면 아침이 복잡하다. 그럴 때는 아이들을 차에 먼저 태우는 게 순조롭다. 그리고 유모차와 짐들을 오가며 싣는다. 10초면 차로 뛰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폭염에 아이들을 장시간 방치한 일에 혀를 끌끌 차지만 안전사고에 얼마나 예민해야 하는가에 있어 정답을 자의적으로 내리는 건 위험해 보인다. 뉴욕에 사는 친구를 만났는데 나 역시 안일하다며 경을 친다. 거기선 아주 잠시 혼자 두었다 잡혀가는 한국 사람들 자주 봤단다.     


[함께 있어도 아이는 다친다]

아이들은 보는 앞에서도 다친다. 아이들, 특히 남자는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다. 처음에는 소파 앉는 데서 뛰더니 조금 지나서는 팔걸이에서 뛴다. 그러다 책상 위로, 그다음엔 책장을 올라간다. 등에 식은땀이 날 때가 많지만 무조건 뛰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흔들리는 곳은 자꾸 치우게 된다. 또 안전하게 뛰게 하려고 넘어져 다칠 수 있는 쪽에 가서 서 있게 된다. 이러다 다치면 속상하지만 솔직히 자책은 덜 든다. 아이들은 다치면서 크는 거라 위안을 삼기도 한다.     


어려운 일은 부모가 함께 있을 때도 아이들이 ‘혼자’ 있을 때가 있다는 거다. 부엌에서 밥 짓는 동안 침대 방에서 뛰다 넘어져 다치기도 하고 세탁기를 돌리러 베란다에 들어간 사이에 화장실에서 미끄러진다. 그래서 실상 아이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모두 집에 혼자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게 다치면 자책을 많이 한다.     


한 사람이 책임지고 아이를 볼 때보다 둘의 책임 소재가 불명확할 때가 더 위험하다. 서로 챙겨주겠거니 할 때 사각지대가 생긴다. 첫 아이가 기어 다니고 뭔가 붙잡고 일어날 때쯤이었다. 이른 아침에 아이 혼자 일어나 움직이다 방안 화장대를 쓰러뜨렸다. 장이 작아 큰 사고가 나진 않았지만, 지금도 우리 부부에게는 가장 부끄러운 순간 중 하나다. 우리는 비몽사몽에 서로 일어나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한번은 엄마가 국을 뜨고 있고 아빠는 밥을 담고 있는 사이에 식탁에 올린 국그릇을 엎기도 했다. 아이가 무럭무럭 큰다는 건 안전 영역의 범위가 계속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엔 그런 감각이 별로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가벼운 화상을 입었지만 역시 아내와 두고두고 반성문을 쓰고 있다. 부모가 지척에 있을 때 방심하다 아이가 다치면 자책은 배가 된다.    


[긴장하기보다는 환경을 바꾸겠다.]

어린이 안전사고의 약 70%가 집에서 일어난다. 한심한 일부 부모들을 손가락질하기엔 곤혹스러운 지점이다. 그렇게 많은 사고가 집에서 일어난다는 건 아이들이 부모가 있을 때도 많이 다친다는 거다. 그 말은 우리나라 가정이 안전사고에 취약하다는 뜻이다. 첫 아이가 안전사고를 당하자 굳게 결심을 했다. 부모가 방심하지 않고 사는 것 이상으로 집 자체를 최대한 안전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그게 아빠의 일이라 생각했다. 사고를 떠올릴 때 ‘혼자’보다는 ‘위험한’에 더 방점을 찍어야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며 아이가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는 가구는 모두 벽에 박았다. 책장은 넘어지지 않게 벽에 붙이는 못을 박았다. 작은 장은 실리콘으로 벽에 붙였다. 미적인 희생은 기꺼이 감수했다. 또 어중간 한 건 그냥 버렸다. 화장실엔 매트를 깔았다. 청소는 힘들어도 미끄러지진 않는다. 그리고 가장 야심 찬 기획은 주방을 나무 펜스로 치는 거였다. 안전사고의 원흉을 부엌이라 규정했다. 날카로운 칼이 있고 뜨거운 불이 있다. 여기만 막는다면 안전사고의 대마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고제로]

처음에는 아내가 반대했다. 구조상 식탁을 펜스 밖에 설치해야 하는데 그러면 음식 오가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답답해지는 것도 문제였다. 주방과 거실이 이어져 있는데 거길 반으로 가르면 양쪽 모두 작아 보일 수 있다. 부엌 안에서 일할 때도 답답한 느낌이 든다. 아내 입장에서 거부감이 드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리니 어쩔 수 없다며 강행했다. 아이들이 다칠 상황들을 언급하며 공포 마케팅을 했더니 아내도 마음을 바꿨다. 펜스를 설치한 이후 우리 집은 안전사고 제로에 도전하고 있다. 그저 뛰어가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일을 빼면 다칠 일을 찾기 어렵다.


펜스는 여러 면에서 긍정적이었다. 궁극적으로 심적 여유가 가장 큰 소득이라 생각한다.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으니 아이들이 뛰어놀 때 소파에 누워 편한 마음으로 잠시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우선 불과 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성공적이었고 그 외 상황에서도 효과적이었다. 얼마 전 유리그릇이 깨졌는데 펜스 안이라 수습이 쉬웠다. 아이들이 사고 현장에 접근할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 없고 다 치운 후에도 한동안 잔여 조각이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도 확보할 수 있었다.    

[예상 밖의 소득]

아이들을 펜스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밀고 들어오려 한다. 맛있는 게, 또 엄마 아빠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한을 둔 건 분명 유용했다. 말로 오지 말라는 게 아니라 물리적 장벽이 있으니 아이들도 결국 받아들인다.(첫째는 이제 커서 펜스를 혼자 열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정한 룰에 따라 허락을 받고 들어온다.) 펜스가 생기니 사탕 등 간식을 통제하는데도 용이하다. 부엌에 물건들을 편히 놓는 것도 좋은 점이다. 아이들 손닿지 않게 두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또 다른 좋은 점은 부모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거다. 밖에서 난리가 나도 주방 안으로 들어오면 평화가 찾아온다. 엄마가 아이들 놀아주려고 정신없어도 아빠는 조용히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아빠가 아이들과 뛰어놀아도 엄마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 펜스 안은 우리 부부의 아지트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곳에서 쉬려니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고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게 어디냐 싶다.    


혼자 두지 말자는 게 안전사고를 막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그건 유용한 방편이지만 허점도 많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이는 같이 있어도 여러 이유로 다친다. 그래서 안전사고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험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거다. 아이를 혼자 두지 말라는 것은 최소한의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아이를 혼자 두지 말게 하는 법은 위험 요인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책임을 부모에게 지나치게 전가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과 사회가 모두 안전한 게 더 근본적인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세상은 위험하니 부모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의미일까?    


[또 다른 펜스]

주방에 펜스를 설치한 지금 집에 이사를 올 때 한동안 망설였다. 모든 게 마음에 들었는데 집 앞에 말 그대로 낭떠러지가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낮은 시멘트 벽(?)을 넘으면 어른 키보다 훨씬 먼 아래 지면이 있었다. 다른 부동산에 물어보니 그 때문에 동네 집값이 비교적 싸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아이들이 어린데 이곳에 이사를 오겠다는 게 제정신인가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찾기로 했다. 정 안 되면 사비로 벽을 만들었다 문제가 생기면 제거하고 이사를 하겠다는 각오를 했다.     

먼저 구청에 민원을 넣었다. 이런 공간이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 황당한 일이라는 점을 어필했다. 그리고 펜스를 설치해주길 요청했다. 구청은 처음에는 도로가 뜻밖에 사유지라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유지가 위험해 사고가 발생할 경우 땅 소유자가 보상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소유자에게 펜스를 설치하게 하라고 답했다. 왜 내가 소유자를 찾아야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위험한 공간을 개선하는 일에 공적 영역이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거다.    

 

민원을 더 넣자 구청은 소유자를 직접 찾기 시작했다. 사실 소유자를 찾지 못하면 구청이 위험을 막을 책임이 주어지는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었다. 결국 구청은 소유자에게 통지하는 데 실패했고 구청은 직권으로 펜스를 설치했다. 땅 소유자에게 이 사실이 통보되었다면 어쩌면 일은 더 복잡해졌을 수도 있다. 분쟁은 개인 간의 일로만 취급되었을지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펜스가 섰다. 처음에는 낮고 프레임도 듬성듬성하여 민원을 더 넣었더니 제법 만족할만한 펜스가 세워졌다. 그리고 우리 집 앞은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골목으로 바뀌었다. 동네 주민들도 기뻐했다. 이후 집 앞에 나가 비눗방울 놀이도 하고 여름이면 물놀이도 했다. 위험한 골목에서 긴장하며 살았다면 그런 시간이 행복했을까 싶다.    

육아 능숙하지 못한 부모가 많고 위험이 많은 세상에 아이들이 살고 있다. 우리 부모들도 안전 의식을 높여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질병 대비 안전사고 비율이 외국에 비해 좀 높다들었다. 각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긴장하고 사는 것 이상으로 부모나 사회나 안전사고를 둘러싼 환경 자체를 바꾸는 일에 더 신경을 썼으면 한다. 그게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아빠가 해야 할 역할은 많다.    



※ 지금까지 [김PD의 반반육아 에세이]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각 가정에 행복과 평화가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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