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PD May 19. 2016

단독자, 인생을 유영하라

영화<마션> 리뷰

지구로의 귀환은 영화에서 많이 다룬 소재지만 <아폴로13>과 <그래비티>를 빼놓을 순 없다. <아마겟돈>처럼 오락적 볼거리가 강한 영화도 있지만 앞선 두 영화는 삶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한 번 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영화다. 


달에 가기 위해 출발했다 실패해 겨우 목숨 건져 돌아오는 이야기, <아폴로13>은 영화가 실패를 다루면 실패한다는 일반적인 공식을 깨고 강한 인상과 감흥을 남겼다. <아폴로13>은 초반에 달 탐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나사 대원들의 모습에 초점을 둔다. 그들에게 달에 간다는 것은 인생을 걸고 키워왔던 꿈을 이루는 일이다. 하지만 13이라는 저주 받은 번호를 달고 발사 전부터 끊임없는 문제가 생기더니 급기야 달에 가던 도중 기계 고장으로 지구 생환마저 어렵게 된다. 우주선에 탑승한 대원들과 나사의 모든 스탭들이 전력을 다해 그들을 지구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인생은 꼭 자기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예상치 못 했던, 원치 않았던 일을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할 때가 있다. 아픈 딸을 돌보기 위해 잘 나가는 직장을 관둬야 할 수도 있고 유망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이른 나이에 코치의 삶을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은 성취가 아닌 생존만으로 가치 있을 때가 있다. 주목 받지 못 하고 외롭게 자신만의 성공을 위해 버텨야 할 때도 있다. 아무런 성과 없이 지구로 돌아오는 아폴로13호를 향한 뜨거운 환영은 우리 인생에서 각자 가진 삶의 목표에 대한 위로와 격려다.

<그래비티>는 주인공들이 위험 그 자체인 우주에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순간에서 출발한다. 폭발한 위성 파편이 지구 궤도를 돌며 같은 선상에서 돌던 우주선과 위성들을 파괴하기 시작하고 거기 있던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졸지에 우주 고아가 된다. 당연히 돌아와야 하는 강렬한 의지를 기대하던 관객들에게 영화는 느닷없이 ‘왜 돌아가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스톤 박사는 유일한 피붙이 딸도 죽고 그저 무심하게 일만 하다 우주까지 오게 된다. 어느 영화 평론가의 말처럼 그녀에게는 관성은 있지만 중력은 없다.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축 없이 그저 예전처럼 살아갈 뿐이다. 지구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이유를 알지 못 했기에 우주에서도 그 고민은 이어진다. 생물은 죽음 앞에서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으니 그녀는 어찌어찌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지만 절망적인 상황에 다다르자 쉽게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관객들도 그 순간 ‘나는 또 왜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가’ 자문한다. 영화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러 의무와 늘어서 있는 일정 속에서 그게 삶을 이어가야 하는 본질인이유인지 묻는다. <그래비티>는 이 순간 다소 거칠게 생의 의지를 소환한다. 상실감은 무엇인가에 대한 갈망이 아닌가 반문한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 듯 영화는 실존적 의미를 주입한다. 의미의 연결고리는 다소 거칠지만 이후 과정은 재탄생, 부활을 위한 거대한 제의(祭儀)다. 사운드와 영상 이미지가 관객을 압도하며 그 재생의 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은 말 그대로 ‘체험’으로서 이 영화가 지닌 성취의 정점을 이룬다.

근래 보았던 최고의 지구 귀환 영화 <그래비티>에, 실화를 바탕으로 지구 귀환에 대한 촘촘한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어가는 <아폴로13>의 뒤를 이어 <마션>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관객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도 역시 선뜻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실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전작처럼 극적이지도 않고 귀환의 전개는 과학적 상상력과 결합되어 있다고 해도 그저 판타지물에 가까워 보인다. 어려운 난관 앞에서 중국이 불쑥 나와 선의를 보이는 것도 뜬금없다. 스토리를 유려하게 끌어나가는 리들리 스콧의 작품이 맞나 싶기도 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다른 것보다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을 대재난과 위기 앞에서 보이는 긍정과 낙관의 마인드에서 찾았다. 주인공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혼자 버려졌다고 분노하지도 않고 위기 앞에 쩔쩔매지도 않고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외롭다고 몸부림치지도 않는다. 배구공에다 사람 얼굴을 그리곤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 담담함의 요체는 무엇일까?

나는 마크 와트니가 최근 국내에서도 관심을 받고 있는 ‘단독자’의 삶을 구현하는 화신과도 같아 보였다. 2012년 출간한 수잔 케인의 <콰이어트>부터 최근 베스트셀러인 사이토 다카시 교수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또 국내 유명 저자인 김정운 교수의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라는 신간까지 근래 우리의 관심은 혼자 사는 삶에 모아지고 있다. 한편에선 대학생들이 바빠서 또 돈이 없어서 친구들과 밥 먹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 밥을 먹는 시대, 그래서 <응답하라1988>처럼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삶의 판타지에 열광하는 시대에 한편에선 혼자 지내는 미덕을 설파하는 말들이 오가는 이 간극은 무엇일까?

같이 먹고 싶어도 혼자 먹어야 하는 삶은 비극적이고 그런 쪽으로 몰아가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 하다. 그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반면 인간관계에 ‘중독’되어 혼자 있지 못 하는 관계 집착, 외향주의 강박은 ‘버려야할’ 일이다. 마크는 화성이라는 완전히 소외된 곳에 혼자 남겨진다. 그럼에도 그는 차분하다. 마치 지구에서도 혼자 살았던 사람처럼 화성에서의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지구로 돌아가 인간 세계에 합류하려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혼자만 살 수 없기 때문에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 부여는 없다. 그래서 때론 지구와의 교신에 성공해 울먹여도 정신적인 거리는 계속 유지하는 게 인상적이다. 영화는 지구로의 귀환을 강렬하게 충동질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농사를 짓고 먹고 음악을 듣고 귀환을 준비한다. 불안하지만 혼자서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보는 이에게 묘한 동경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점점 모든 관계가 한 개체의 생존과 풍요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 같다. 팀워크를 이뤄야 하지만 성과는 구분된다는 심리적 분리감,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해도 결국 혼자 남겨졌을 때 자립할 수 없다면 우스워진다는 통감, 결국 제 역할을 잘 해야만 조직 안에서도 제 자리가 생긴다는 현실 인식이 관계 강박에 대한 재검토를 부추긴다. 이런 인식에선 우리 인생이 가시적으로 영역과 역할이 구분되어 보이지 않는 축구보다는 함께 목적을 취하지만 명확한 거리를 두고 각자도생하는 야구 같아 보인다. 

개체의 생존을 위해선 오직 개체의 발전을 위해 몰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독립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한국이라는 관계의 정글에서도 자라나고 있다. 막상 고독을 스스로 택했을 때 의외로 외롭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혼자 지내다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를 만들었을 때 더 충실해질 수 있다. 관계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자기 내면에도 발견할 수 있는 보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마크 와트니가 접선 지점까지 고독한 주행을 계속하는 장면에서 감정적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건 무사귀환을 통해 완성될 것 같았지만 실제 결말 부분의 방점은 지구로 돌아와서 혼자 사색하고 있는 마크의 모습에 찍혀 있다. 단독자는 어쩔 수 없어 혼자인 것이 아니라 혼자인 게 기본이다. 영화는 이렇게 말 하는 것 같다. 우주도 인생도 단독자만이 마음껏 유영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타지와 현실의 절묘한 봉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