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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PD Jun 07. 2016

<인생은아름다워> 웃음의 두 얼굴

‘심슨 가족’, ‘더 오피스’의 수석작가인 대니얼 전의 최근 인터뷰 기사(news.joins.com/article/20128528)를 봤는데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에서 9·11 테러와 같은 비극이 있었을 때 코미디 작가들은 어떤 고민을 했나?’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SNL> 등 적잖은 코미디 쇼가 휴방했다. <어니언>이라는 풍자 뉴스 매체도 처음엔 발행을 못했다. 그러다가 9·11 테러 사건 이후 첫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망했다(Holly Shit)!’라 써서 내보냈다. 많은 사람이 그걸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코미디에는 치유 효과가 있다. 어떤 비극에 대해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그 비극이 절대 극복 못할 일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는 웃음이 주는 힘이 무엇인지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코미디 작가로서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엔 조금 다른 결로 대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부쩍 쉽게 분노하는 것 같다. 희극인에겐 힘든 상황이다. 기분 나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에겐 조금만 과한 농담을 해도 사회에서 완전히 배척당할 만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분노로 가득 차 있어 분노가 트렌드로 읽히는 세상이긴 하지만 정도가 다를 뿐 본질은 예전도 같았다. 사람들은 폭언을 들었을 때보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유머의 대상이 되었을 때 더 분노하고 더 오래 기억한다.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 뺨을 맞게 하는 웃음과 절망적 순간에 삶의 근원적 힘을 주는 웃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다보니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1999년작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떠올랐다.(지난 4월 재개봉하기도)

※ 오래 전 개봉한 영화지만, 스포일러 있습니다.

<인생은아름다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포로수용소에서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살이라는 말을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용소에 끌려온 아버지 귀도는 어린 조슈아를 달래며 어른들이 노동하는 사이에 숙소에 잘 숨어있게 하기 위해 어린 아들에게 흥미로운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는 울지 않고 배고프다고 조르지 않는 등 점수를 많이 따면 진짜 탱크를 선물로 줄 거라 말한다. 어린 조슈아는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독일군을 피해 숨어 지내게 되는데, 한번은 조슈아가 귀도에게 그런 게임은 없으며 여기는 사람들을 죽여 비누를 만드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한다. 귀도는 사람을 비누로 만드는 게 말이 되냐고 익살스럽게 반문하며 그런 말에 속으면 게임에 지는 거라 타이른다. 너무 어이없는 학살의 참상이 오히려 아이를 설득하는 근거가 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참극을 받아들이면 정말 우리의 삶은 끝이라는 점에서 게임의 룰은 어린 조슈아만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시종일관 유머를 통해 낙관이 어떻게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지 신비롭게 설명한다. 논리로 말할 수 없지만 웃음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풍자를 통해 극악한 나치의 실상을 폭로한다. 억압이 점점 가까이 또 크게 다가옴에 따라 과연 유머라는 유약한 방법으로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때마다 의연하게 맞서고 또 넘어서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귀도가 새벽 무렵 목격하는 거대한 시체더미가 아니다. 귀도는 건강 검진을 하다 친분이 있던 독일 의사 레싱 박사와 재회한다. 그를 수용소에서 만나다니 이런 천운이 또 있을까? 수수께끼를 좋아했던 그 둘은 어려운 문제를 서로 내고 맞추며 돈독한 우정을 쌓아갔던 사이였다. 그 덕분에 귀도는 수용소 내 있는 독일군과 가족들이 지내는 식당에서 서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레싱 박사가 자신과 가족들을 살려줄 것에 희망을 건다. 어느 날 레싱 박사는 눈치를 살피다 적절한 찬스에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며 귀도를 몰래 부른다. 하지만 뜻밖에도 레싱 박사는 그간 귀도를 보지 못 해 오랫동안 풀지 못 했던 수수께끼 하나를 꺼내며 답을 아는지 묻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순간에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수수께끼 놀이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유희, 즐거움, 또 웃음이다.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지적인 장난이다. 그런데 그 웃음이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관객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처절하게 끌고 가는 유쾌함과 다르다. 귀도가 아들에게 보여주는 유희와 레싱 박사가 즐기는 유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레싱 박사의 죄는 사람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에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빠져 사는 것. 그런 마음으로 어떤 독일인은 유태인들을 기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냈고 또 누군가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가스실의 벨브를 열었으며 시체를 가지고 비누를 만들었다. 인간의 유희는 생지옥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만드는 반면 생지옥을 만들기도 한다.

파시즘이란 인간 개별의 욕망, 처지, 생각을 분별하기보다는 하나의 틀에 넣고 단일화한다. 그리고 그 틀에 사람들이 맞추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거부하면 그를 다수의 적으로 돌린다. 그래서 나는 100 퍼센트 통합된 사회를 꿈꾸는 정치 지도자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도 내 입장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 웃음이 나를 위로하기보다 나를 절망하게 한다. 그들은 사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단 한가로운 웃음을 보여줄 때가 많다. 그 여유는 복잡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손쉬운 단순 논리를 세웠기 때문에 가능하다. <뿌리깊은나무>의 세종대왕의 말처럼 우리는 왕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유쾌한 농담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유머러스한 건 사람의 중요한 매력이다. 나 역시 농담이 관계를 윤택하게 하고 돈독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런데 남을 웃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항상 얼마나 더 유쾌한 농담을 잘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쏟지만 사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말실수가 인간관계를 한 순간에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갈린다. 웃고 있는 얼굴로 상처 받을 말을 들을 때 사람은 가장 모멸감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웃음은 양날의 검이다. 무관심한 사람일수록 절망을 찌르기보단 동반자를, 또 스스로를 찌르기 쉽다.

레싱 박사가 수수께끼를 물을 때 귀도의 표정은 서늘하다. 인간에 대해 가장 큰 절망을 느낀 얼굴이다. 영화는 웃음이 비극적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을, 또한 어려움을 극복할 지혜를, 곤경을 쉽게 넘어설 신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웃음이 주는 잔인함을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명성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군 탱크 덕분이라는 어떤 이들의 냉소에 동의하지 않지 않으며, 전쟁을 희화화하고 파시즘의 패악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비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악의 근원을 묻는 차가운 시선이 한 데 엮여 있다. 단지 웃고 넘어가자는 식이 아니라 인간성은 사람 간의 관심과 애정을 통해 완성된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하나의 쉬운 이야기에서 깊이 있는 두 개의 시선을 던진다는 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득력 있는’ 웃음을 주기 위해 촘촘하고 친절하게 복선을 깔아준 것도 고맙다. ‘우리가 이겼다’는 조슈아의 말처럼 깊이를 담은 유머는 인간의 승리이고 또 영화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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