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아빠는 동생으로부터 동종조혈모세포를 이식받기 위해 입원하셨다. 그로부터 약 한 달의 간격을 두고 아빠의 병간호를 위해 보호자가 상주해야 된다는 병원의 연락을 받고, 아빠를 뒤따라 병원으로 들어간 엄마는 아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9개월 동안 아빠와 병원에서 지냈다.
포스트 코로나 그리고 격리 병동 입원환자의 보호자라는 제약조건은 엄마가 네 번의 계절을 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집에 다녀 갈 수도 없게 했고 가족이나 지인과의 접촉도 허락되지 않는, 일상이 완전히 무너진 삶을 살도록 했다. “시스템”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국내 빅4인 대형 병원에서 24시간을 지내면서 보호자는 아파도 약을 구할 수 없는 사실이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한편으로 참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나는 어떤 마음이 엄마를 그 길고 힘겨운 세월을 버티게 했는지 오래 궁금했다.
입원 초기 다시 말해 이식 수술 이후로 몇 달은 아빠의 면역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워 감염 위험이 굉장히 높았던 때였다. 보호자의 외출 및 외부인과의 접촉은 절대 불가했고, 심지어 빨래를 하러 갈 수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러 갈 수도 없었다. 더욱이 엄마는 처음 병원에 들어갔을 때 길어야 1주일 정도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을 터.
그러니 아빠를 뒷바라지하는 엄마를 내가 뒷바라지해야 했다. 1주일에 몇 번 엄마의 빨래거리를 받아다 세탁을 해서 가져다주거나,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필요한 옷가지를 전달했다. 식당을 제대로 가지 못하니 과일이나 반찬거리 등을 챙기고, 때로는 아빠가 유독 입에 당기는 음식이 있다고 하면 함께 전달했다.
당시에 나는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 출퇴근을 하던 때였다. 퇴근을 하고 세탁한 옷과 엄마가 요청한 물품들을 챙겨 병원으로 향한다. “물품 전달”의 항목에 체크된 임시 출입증을 발급받고, 세 번의 관문을 통과하면 아빠와 엄마가 있는 격리 병동 입구이다. 병동 입구와 병동(외부인 출입 제한 구역)의 경계에 마지막 게이트가 있고, 그 게이트 앞 복도에서 엄마와 나 사이에 물품 전달식이 행해진다. 그곳이 바로 멀리서나마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엄마는 병동 게이트 바로 앞에서 나는 약 2-3미터 떨어진 병동 입구로 들어서는 쪽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복도 중간 즈음 그러니까 방금 지나쳐 온 세 번째 관문과 마지막 게이트 사이의 중간 지점의 바닥에 엄마에게 전해줄 물건을 담은 쇼핑백을 내려둔다. 그리고 쇼핑백을 기준으로 약 1.5미터 뒤로 물러선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들고 가야 할 짐을 담은 쇼핑백과 내가 내려둔 것을 바꿔 들고 다시 1.5미터 정도 원래 서 있던 쪽으로 물러난다. 엄마가 멀어지면 나는 엄마가 바닥에 내려 둔 것을 집어 들고 다시 뒤로 물러나는 식이다. 중간 지점에서 함께 만나 서로의 것을 교환하는 방식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문득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판문점에서 서로를 향해 마주 보고 서 있었던 남북한 군인 둘. 이 둘 사이의 거리가 엄마와 나의 거리보다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는 얼굴을 가까이 마주 할 수도 손을 맞잡을 수도 없었다. 때로는 간호사 선생님께서 우리를 감시하러 왔다 갔다 하시기도 했다. 우리가 혹시라도 접촉할까 봐 그렇다. 그렇게 엄마를 멀리 두고 5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은 병원에 갈 때와는 달리 한강 공원으로 걸어가는 길을 택했다. 어둑해진 한강과 한강물에 비친 불빛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걸어가는 길은 언제나 눈물바람이었다. 그리고 부모 없는 삶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종합운동장에서 잠실 방향으로 난 한강 산책 코스는 지난 5년간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아산병원을 다녀오기 위해 자주 다녔던 곳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멀리 보이는 병원을 바라보며 저곳 어딘가에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 위로를 받기도, 때로는 원망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약 1년이 넘도록 나는 차마 한강에 가지 못했다.
엄마가 병원으로 들어간 이후로 엄마와 처음 나란히 앉은 날은 아빠가 이식 수술을 받은 이후 얼마되지 않아 폐에 출혈이 있어 갑자기 응급수술을 들어가야 했을 때였다.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며 병원에서 환자와 자녀들이 통화를 하게 하라고 했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병원에 들어가 아빠를 볼 수는 없었지만 무섭고 불안한 마음에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병원 앞 정원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아빠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잠깐 구내매점에서 물건을 사 오는 것을 허락받고 나를 만났다.
멀리서 다가오는 엄마를 보자마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1-2개월 새 너무 말라서 앙상한 뼈만 남은 엄마를 보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는 것을 물론 시끄러운 의료기기 소리로 가득 매운 좁은 병실에서 매 순간 두렵고, 하루 종일 긴장으로 가득 차 장기간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태일 엄마가 불쌍해 지금 막 수술받으러 들어간 아빠는 뒷전이었고, 엄마를 앞에 두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마주한 엄마와 처음 손을 잡고 이야기했고, 나는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지금 막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통화를 끝내고 아빠가 수술장에 들어가고 나서야 마침내 엄마를 만날 수 있다니 말이다. 그 이후로 아빠와 엄마, 내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몇 번 더 있었는데, 그중의 한 번은 패혈증으로 아빠에게 한차례 또 위독한 순간이 와 중환자실로 옮겨져 처음으로 면회를 갔을 때였고, 마침내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자리는 임종면회였다.
그렇게 우리는 9개월 동안 온 가족이 모여 밥 한 끼 하지 못했고,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던 가족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병과 고군분투하며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내내 혼자였다. 그렇게 나는 고아가 된 것처럼 부모 없이 살았다.
우리는 해체된 가족이었다.
우리 가족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을 땐 아빠는 차가운 트레이 위에 수의를 입고 뉘어있었다. 이제는 영원히 넷이 되는 일은 없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