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면회 가는 길(2)
(1편에 이어서...)
"아빠..."
어색하고 낯설고 너무 무서워 소리 내어 부르기가 겁이 났다. 아빠는 대답이 없다.
"여보, 당신 딸 왔네, "하고 엄마가 불러보아도 아빠는 대답이 없었다.
우리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아빠의 머릿속 미세한 뇌출혈을 체크하기 위해 담당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아빠의 팔을 꼬집으며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누구누구님~!" 하고 여러 차례 호명했다. 하지만 아빠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어차피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안 되고 의미도 없으니 그냥 두고 보자는 식의 말을 남기고 병실 밖으로 나가셨다.
아빠의 병은 '다발골수종'이라는 혈액암의 한 종류로 자가조혈모세포이식을 한 차례 받은 이후 몇 년이 흘러 암이 재발했고, 남동생으로부터 동종조혈모세포이식을 받아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빠를 죽음으로 향하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암세포가 아닌 끊임없는 합병증 때문이었다. 특히 거대세포바이러스의 수치를 줄이기 위해 사용했던 약물로 인한 폐, 장, 신장 등 온몸 구석구석을 돌며 찾아온 합병증이 결국 아빠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다 하다 뇌출혈이라니. 나는 새삼스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아빠 곁에 앉았다. 겉잡을 새도 없이 흐르는 눈물을 이제는 그저 흐르게 둔 채로 두었다.
임종면회라는 것은 임종보다는 면회에 더 가까웠다.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임종을 목전에 둔 환자를 가족들이 에워싸고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서서히 이별하는 것. 그리고 서서히 환자의 숨이 멎어 가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 우리의 임종면회는 그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나에게는 고작 30분이 주어졌고, 그 시간 안에 이제는 다시 못 볼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는 다시 병실을 나와 외부에서 대기해야 했다. 코로나가 지나간 지 이미 오래였지만 그 전염병은 여전히 아빠의 마지막 호흡, 한 호흡을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나는 아빠의 손을 몇 번 잡았다 놓았다 하고, 손을 맞잡은 사진과 축 처진 아빠의 모습도 사진으로 여러 장 담아두었다. 아무리 찍어도 아빠는 그대로인데, 어쩐지 똑같은 모습을 남겨 두었다. 이따금씩 아빠의 감긴 눈 밖으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색하고 서툰 몸짓으로 눈물을 여러 차례 닦아주었다. 내가 아빠의 눈물을 닦아준 적이 있던가. 이미 다 끝난 일이지만 그때 아빠의 눈물은 내 목소리를 듣고 흘렸던 것이기를 오래오래 바랐다.
감사하게도 나와 동생에게는 임종 면회가 한 번 더 주어졌다. 첫 번째 면회 이후로는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병원 1층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언제 전화가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에 갈 수도, 밥을 먹으러 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담당 선생님께서 혹시 면회를 할 다른 가족들이 가까이에 있으면 부르라 하셨고, 마침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와 남동생이 아빠를 한 번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동생 각각 두 번씩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임종면회를 하기 전 그 무렵에는 내게 곧 그 차례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섬망’이라는 것을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이성민 배우가 연기할 때나 봤지, 내 아빠에게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섬망증세는 결국 내 아빠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것에 대하여 자세히 찾아보다가 임종이 가까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여타의 증상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아빠의 임종의 임박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오래 병을 앓았던 부모나 형제가 있는 경험이 있는 자라면 그 끝을 준비해 보았을 것이다. 준비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너무 체계적이고, 그저 상상이나, 예상 정도였을 것 같다. 나는 그랬다. 동생으로부터 골수이식을 받아 생착이 되면 퇴원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회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다. 다시 암이 재발되더라도, 하다 못해 단 1년이라도 집이나 요양원에서 휴식하며 일상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생겨나는 합병증 때문에 회복은커녕 입원을 한 지 9개월째에 접어들고 나니, 그리고 이제는 의식마저 뚜렷하지 않은 날들이 오고 가니 그동안 머리 한 구석에서 나왔다 숨었다 했던 그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본격화되었다.
그 ‘준비’의 시작은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임종 면회’와 ‘장례’라는 검색어를 넣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앞서 게시해 놓은 글들을 차례로 읽어가며, 흐르는 눈물은 소매로 거칠게 훔쳐가며, 그 와중에 필요한 내용들을 챙겼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직감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죽음을 직접 준비해 본 적 없었고, 이를 대신할 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임종 면회를 갈 때까지도 아빠가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는 단계에 맞추어 가족들이 거쳐야 할 절차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조사의 끝은 나로부터 아빠가 들을 마지막 말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한 좋은 말이 있는지 검색도 했다. 이렇게라도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아주 나중에 후회를 할까 겁이 났다. '아 그때 아빠에게 이 말이라도 할 걸' 하고 말이다. 말을 고르고 골라 마지막 말을 완성해 두고 스마트 폰에 저장해 두었다. 여러 차례 연습도 했다. 혹시 그 ‘때’가 오면 우느라고, 혹은 당황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할까 봐,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그 몇 마디를 혼자 집에서 몇 번이고 읊조렸다.
이내 낯선 병실의 공기와 소리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제야 그동안 엄마와 서로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것.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이 피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이제는 꺼내야 할 때임을 알았고, 엄마에게 그 무거운 말을 처음으로 꺼낸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장례식은 여기서 하는 거야?"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도리가 없어 닦기를 포기하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혹시라도 본인의 죽음을 기리는 행사에 대한 진행사항을 아빠가 들으면 무섭진 않을까, 아니면 차라리 우리의 말을 듣는 편이 나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동생과 두 번째 임종면회를 했을 때에는 치료실 밖에서 엄마와 동생이 소곤대길래 귀를 기울여 보았더니 둘이서 아빠의 영정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미 나는 장례 절차에 대해 조사를 이미 끝낸 상태였기에 나에게 쓸만한 사진 몇 장이 있으니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 가족이 아빠의 장례 준비에 대하여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준비된 시간보다 조금 더 사정을 봐주신 당직 선생님께서 이제는 그만 정리를 하라는 신호를 주셨다. 마침내 아빠에게 이별 통보를 해야 할 순서가 왔다.
살아있는 내 아빠의 모습을 보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다. 이 병실을 나가면 내게는 이제 아빠가 없다. 눈도 못 뜨고, 말도 못 하는 상태의 아빠라서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이별은 상상할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아빠가 내 마지막 말을 듣고 있는지 들을 수 없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준비한 말을 건네야 할 차례다. 그동안의 우리 관계는 마치 이렇게 무뚝뚝한 부녀는 아마 세상 어디에도 없을 듯한 그런 사이였다. 그럼에도 그 마지막은 나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딸로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빠의 손을 잡고 한 손은 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오랫동안 연습했던 말을 전했다.
아빠는 최고의 아빠였다고,
내 아빠 해줘서 고맙다고,
우리 나중에 꼭 또 만나자고,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