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온 다정

by 킴프로


아빠는 나에게 전혀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는 포옹을 하거나 손을 잡는 일이 없었고, 양쪽 모두 텍스트가 아닌 목소리를 내어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도 없다.

생일이나 어버이날, 새해 같은 기념일에 메시지를 보낼 때나 형식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나 하트 이모지를 전송한 것이 전부였다.


대화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거나 아빠가 엄마의 휴대폰을 대신 받았을 때 겨우 한 두 마디를 건넸다.

나의 소식은 대부분 엄마를 통해서 아빠에게 전달되었다. 아빠가 내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게 직접 묻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가 대신 답을 받아 전했다. 그만큼 아빠와 나는 오랜 시간 서먹한 사이였다. 기억으로는 20대 후반까지도 아빠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꽤 오랫동안 아빠를 싫어했다.

그럼에도 “아빠”를 주제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버튼을 누른 듯 눈물이 흘렀다. 단순히 눈물이 많은 탓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빠를 싫어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간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23년 1월, 아빠가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던 날. 병원 1층 만남의 광장에서 엄마와 아빠를 만났다.


어쩐지 아빠는 나를 보자마자 아주 반가워하며 웃었다.

아빠가 나를 보고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내 기억에는 없었다. 아빠는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에 팔을 올렸다. 나는 이미 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툭 치면 언제라도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빠와 눈을 마주치면 그대로 눈물바다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애써 얼굴을 아빠와 나란한 방향으로 두었다.


엄마가 입원 수속을 밟는 동안 아빠와 나는 말없이 서서 눈으로 엄마를 쫓았다. 앞선 이야기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보호자 한 명만 병동에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두 사람을 들여보내고 혼자 돌아가야 했다.


곧 엄마가 돌아왔고, 마침내 아빠와 이별할 시간이 되었다.






그곳의 분위기는 마치 공항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캐리어, 짐을 가득 실은 카트들이 오가고 있는 것이 꼭 출국장을 방불케 했고, 출입증을 검사하고 허가받은 사람만 통과시키기 위해 쳐 놓은 통제선은 출국 게이트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 통제선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마지막 인사일지도 몰랐다.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아빠는 워낙 강한 사람이었고, 반드시 살아서 회복할 것이라는 굳건한 의지를 지녔었다. 엄마는 그보다 더 강했다. 우리는 아빠가 예상보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슬퍼하고 있지만, 사실 7년의 투병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덕이 크다.


그때의 엄마와 아빠는 반드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우리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아빠가 나를 안았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

나의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파이팅. 힘내세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입을 더 열었다가는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아빠는 힘주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살아서 나갈 거야.”


그리고 아빠는 엄마와 함께 통제선을 넘어 병동으로 향했다.

아빠와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꼭 다시는 볼 수 없는 이를 보내는 사람처럼 울었다.






아빠와 엄마가 다음 관문을 통과하던 중 엄마의 출입증에 문제가 생겨 엄마만 다시 나왔다.

아빠는 통제선 너머에서 캐리어를 끌고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빠는 차단봉 벨트 위로 팔을 넘겨 내게 내밀었고 마치 악수를 하듯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통제선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 섰다.


아빠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그 환했던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 손을 잡고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빠는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나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운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눈물 닦기를 포기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겨우 서로의 손만 잡고 힘겹게 서 있었다.


엄마가 다시 출입증을 발급받는 동안

우리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

내가 청소년, 성인이 되고, 그리고 그 이후로 오랫동안 각자 쌓아두기만 했던 마음을 마침내 서로에게 드러내었던 때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 이후로도 두고두고 그날의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눈물짓는 까닭은 내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아빠의 다정함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결국 그때의 그 인사는 아빠가 평상복을 입고, 두 발로 서서, 힘 있는 목소리로, 내 눈을 바라보며 하는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일상의 곳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터졌다. 늦추위가 찾아와 외출하기에는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 목적 없이 오래 걸었다.


몇 날 며칠을 테헤란로를 걸었다.

도시의 밤을 헤매며 병원 1층에서 말없이 아빠와 손을 잡고 있던 그 순간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렇게 길 위에서 많이도 울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는 아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SNS에 올리기도 하고, 꽃과 나무를 들고 아빠가 묻혀 있는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1년이 넘도록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가까운 지인들은 우리가 원래부터 아주 다정한 사이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빠가 병원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 나는 갑자기 인정 많은 딸이 되었고, 아빠는 다정한 아빠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렇게도 서먹했던 사이였는데 말이다.






그 해의 추석 즈음 그러니까 아빠가 세상을 떠나기 약 한 달 전이었을 무렵 아빠의 병세가 심해져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애석하게도 아빠가 입원한 지 처음으로 면회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중환자실로 옮기기 전후로 아빠는 섬망증세로 인해 인지기능이 많이 저하된 상태였다. 아빠의 의식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단단히 각오를 하고 병원에 갔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면회를 온 다른 환자의 가족들과 함께 줄지어 중환자실로 입장했다. 드라마에서나 봤던 의료기기들로 가득 찬, 하얀 벽으로 사방이 막힌 병실이 칸칸이 들어서 있었고, 굳게 닫힌 이중 유리문 너머로 중증환자들이 한 명씩 누워있었다.


나는 이름표도 보지 않고 금세 아빠를 발견했다.


비닐로 된 가운을 입고, 손을 소독한 뒤 장갑을 끼고, 난생처음 중환자실이라는 곳에 출입했다. 아빠는 우리가 온 줄 모른 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통증으로 괴로워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아빠가 겨우 눈을 떴다.

그리고 엄마와 나를 발견하고는 내가 알고 있는 아빠의 그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나는 눈빛을 보고 아빠가 나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곧장 아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간의 세월 동안 아빠와 나 사이에 오래 묵은 어색함과 쑥스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엄마는 아빠를 마치 아기 다루듯 한 손은 아빠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아빠의 왼쪽 뺨을 어루만졌다. 병든 아빠를 직접 보는 것도, 그런 아빠를 대하는 엄마의 모습도 전부 처음 보는 광경이라 낯설고 무서운데 엄마의 애달픈 그 마음까지 나에게 눈물을 보탰다.


엄마는 아빠가 나를 알아보게 하려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보 이게 누구야?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게 미소 지었다.

그 눈빛은 영락없이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빠는 힘겹게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자기 딸 못 알아보는 아빠도 있어?”






약 30분을 면회하는 동안 아빠는 한순간도 내가 놀랄만한 모습, 말하자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거나, 갑자기 주사 바늘을 뽑는다거나, 옛날이야기를 하는 등의 섬망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장기 입원과 수 개의 합병증 그리고 그에 대한 치료로 많이 쇠약해져 있었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한 번씩 괴로워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내가 기억하는 그 말투로 밝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들 딸이랑 같이 살려면 여기서 살아서 나가야지~”






어느새 면회 시간이 끝났고, 우리는 아빠를 혼자 두고 병실 바깥으로 물러났다.

유리로 된 자동문이 닫혔다. 그 문을 열고 다시 한번만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닫힌 문 너머로 얼마간 아빠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얼마나 무서울까.

평생을 엄마밖에 모르고 산 엄마바라기인 아빠가 곁에 엄마도 없이 중환자실에서 홀로 고통과 싸운다고 생각하니 가엽기가 그지없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아빠도 아직 떠나지 않은 나를 발견하고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다정한 부녀 사이였다.


'다정'은 별것 아니더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

서로 손을 잡는 것,

서로에게 미소 짓는 것,

그것뿐이었다.






24년도 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중년의 외국인 남성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짙은 분홍빛 목련이 한가득 핀 커다란 나무를 부지런히 찍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이상하게 자꾸 아빠가 떠오르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그곳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장소로 관광객이 아주 많아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매로 연신 눈물을 훔쳐가며 서둘러 빠져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날짜를 보니 아빠의 생일이었다.


이번 회차를 준비하면서 이전의 글들을 쓸 때보다 유독 더 슬펐다. 마치 아빠가 엊그제 돌아가신 것 마냥 눈물이 흘렀다. 더는 손을 보기가 힘들다.


오늘이 아빠의 생일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