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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Oct 28. 2020

당신의 흔적



작년 9월, 혜미언니의 사망기사를 접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일시적으로 뭘 못했다. 며칠 동안은 혜미언니의 노래 '루저'와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번갈아 들으며 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그리고 일생에 단 한 번뿐이었던 우리의 짧은 대화를 계속. 계속. 떠올렸다.


혜미언니는 방송 '보이스 코리아 시즌1'에서 처음 보았다. 고유한 음색과 독특한 성격, 사복 스타일부터 노래 선곡 스타일까지 전부 다 좋아 그때부터 '우혜미'란 사람을 응원했다. 보코가 종영된 이후에도 나는 혜미언니를 좋아했다. 야자 시간에 선생님 몰래 어떤 전자기기로(뭐였는지 생각이 안 난다) 유튜브에 들어가 혜미언니가 여러 소규모 공연장에서 노래하는 영상을 보곤 했다. 하지만 이내 수시다 대입이다 뭐다 하는 큼직큼직한 상황들로 인해 혜미언니의 존재는 수면 아래로 조용히 잠겼다.






시간이 흘러 이제 막 대학교 2학년이 되던 3월 어느 날, 상수에 있는 '제비다방'에서 혜미언니가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친구를 데리고 아주 일찍부터 제비다방에 갔다. 텅텅 빈 지하 공연장에서 나와 내 친구는 당당하게 제일 앞자리를 선점한 후 구운 가래떡을 꿀에 찍어 먹으며 공연을 기다렸다. 공연 시간이 임박해오자 공연장은 사람들로 빽빽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이 시작됐다. 실제로 처음 보는 '노래하는 혜미언니'는 신기하기보다 되려 친숙했다. 


공연 중반쯤이었을 거다. 혜미언니는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노래하는 혜미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혜미언니도 내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혜미언니가 오직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만 같은 이 상황을 달콤한 착각으로 여겼다. 내가 아니라 내 주변 무언가에 시선을 뺏긴 거겠지 라는 생각으로 찌릿찌릿 전기가 오른 마음을 다스렸다. 혜미언니는 그렇게 우울한 편지를 완창한 후 다시 관객석을 이리저리 바라보거나 혹은 허공을 응시하며 남은 노래들을 불러나갔다. 


공연이 끝이 났다. 나는 공연장 밖으로 나가려는 혜미언니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언니 팬이에요.." 하고 수줍게 말을 건넸다. 나를 본 혜미언니는 그자리에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가 나한테 눈을 안 떼길래 나도 너만 보면서 노래를 불렀어." 달콤한 착각이 아니었다.






날 바라보며 노래했던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 내 손을 잡아줬던 혜미언니 손의 온기, 우리의 짧은 대화. 혜미언니는 그 날. 그 짧은 순간. 나에게 쉽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떠났다. 영영 떠났다. 그 흔적은 처음 남겨졌을 때보다 지금이 더 선명하다. 평소에는 흐릿해서 거의 보이지 않다가 혜미언니의 죽음, 그 잔인한 사실이 떠오를 때면 선명해진다. 내게 이런 변덕스러운 흔적을 남긴 언니가 불공평해서 조금은 밉다. 나도 언니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더라면 공평했을 텐데. 


흔적은 지금처럼 흐려지고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다가 제 생을 다하면, 그러니까 내가 혜미언니를 기억에서 완전히 잊으면 사라지겠지. 시간과 환경이 그렇게 만드니까. 하지만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세상에 남아있는 동안은, 그 흔적은 내 몸 어느 한구석에 희미하게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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