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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Oct 28. 2020

글을 쓰고 싶은데, 글감이 없다면

'글감 가뭄 현상' 이겨내기


나는 매일 에세이를 쓴다. 노션에 매일 기록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하루는 건너뛰었다. 친구들이랑 술 마실 때. 그때를 잠시 얘기해보자면,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글을 쓰려고 했다. 11시쯤이면 집으로 돌아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판단해 글쓰기 스케쥴을 술 약속 뒤로 미룬 것도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술자리에서 재미있는 '글감'이 나올 것이라는 아-주 계획적이고 교활한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술자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중간에 체력이 바닥나버린 나는 먼저 택시를 타고 도망치듯 집에 갔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2시 30분. 글을 쓰기로 했던 시간이 훌쩍 넘었고 나는 긴 술자리로 체력이 바닥나 있었고 중요한 건, 너무 취해 친구들과 무슨 얘길 했는지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글감을 얻어 오긴 개뿔 기억만 잃고 왔다. 이날이 유일하게 에세이를 쓰지 못한 날이다. (이날 나의 미친 친구들은 아침 7시까지 술을 마셨단다)




비록 하루 빼먹었지만, 매일 에세이를 쓰다 보면 '글감 가뭄 현상'을 겪는 날이 온다. 도대체 뭘 써야 할지 모르겠는 날이다. 노션에 만들어 놓은 '글감저장소' 페이지가 있는데 거기엔 내가 틈틈이 기록해서 모은 80개가 넘는 문장, 단어, 에피소드들이 있다. 평소 같으면 글감저장소에서 하나 쏙 골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에세이를 쓰지만 '글감 가뭄 현상'이 오면 글감저장소를 훑어봐도 도저히 뭘 써야 할지 모른다. 옷장에 옷이 차고 넘치는데 '입을 게 하나도 없어!' 하며 성질 내는 상황과 결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매일 쓰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으니 뭐라도 쓰려고 일단 빈 창을 연다. 멋진 글을 쓰고 싶으니 처음엔 아주 거창한 주제들을 생각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계몽주의와 인문주의에서 말하는 평등의 의미에 관한 내 소견'. '에리히 프롬이 정의한 독창성에 관하여'. '슬픈 사람이 유독 추위를 느끼고, 독서에 심취하게 되는 현상 파헤치기'. 등등. 화려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런 주제의 글들은 쓰다가 중간에 지쳐버리거나 흥미를 잃는다. 꾸역꾸역 써놨다고 치자. 쭉 읽어보면 뭐라는지 모르겠다. 분열증이 온 글 같다. 결국엔 버려진 글이 된다.

이렇듯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초반엔, '글감 가뭄 현상'이 오면 완벽함에 대한 압박이 강해져 거대한 주제를 만들어냈고 그 거대하고 흉한 피조물에 스스로 깔려버렸다. 시간이 점점 지나자 이 현상이 오면 저절로 힘이 빠져 시시한 이야기나 '찌끄리고' 봤다. 친구와의 소소한 대화나, 매일 하는 필사에 관한 느낌이나, 잠잘 때마다 들리는 아래층의 TV 소리나. 그런데 이런 별것도 아닌 이야기들. 시시콜콜한 글들이 쓰다 보면 엄청난 몰입감을 줬다. 그 몰입감은 허기도 잊게 하며 다 쓰고 보면 2,000자 넘는 글로 이루어진 그럴듯한 한 편의 에세이가 되어 있었다.



"문제가 생길 땐, 컬러 대입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흑백으로 작업하며 승부를 봐라."

시각디자인학과 '심볼과 로고 디자인' 수업에서 H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한 학생이 연필 스케치 단계에서 디자인이 풀리지 않자 일러스트레이터에서 형태를 만들고 컬러를 넣어 그럴듯하게 보이는 심볼을 가지고 왔을 때 그렇게 말씀하셨다. -H교수님은 워낙 뼈있는 말을 많이 하셔서 나는 수업 때마다 교수님의 말을 은밀하게 기록하곤 했다. 앞으로 올릴 에세이에서도 종종 H교수님의 명언을 인용하려 한다. 기록해두길 잘했다- 교수님은 그 학생의 심볼에서 부자연스러움과 거북함을 느끼셨던 거다. 교수님뿐만 아니라 그 수업을 듣고 있던 수강생 모두가 그 느낌을 받았으리라. 나에게도 거북함이 전해졌으니까.

나는 '그 학생의 짓'을 하고 있었다. 글쓰기에 문제가 생기자, 휘황찬란 컬러풀한 주제로 어떻게든 내 글쓰기에 제동이 걸렸다는 사실을 덮고자 했고 그건 결국 부자연스러운 글이 되어 완성조차 못 했다. 되려 흑백처럼 평범하고 익숙해서 사소해 보이기까지 한 주제로 에세이를 완성했고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에 게시했다.『에고라는 적』의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가 자신에게 깨달음을 준 문장 'EGO IS ENEMY'를 오른팔에 문신으로 새긴 것처럼 나도 H교수님의 말을 왼팔에다가 새겨볼까. 너무 기니까 종아리는 어떨까. 이왕 멋있게 아치형 모양으로다가 등짝? 어디에 새기든 교수님은 그런 나를 보면 변태 취급하며 도망가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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