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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Nov 02. 2020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


퇴근 시간대 지하철 안, 운 좋게도 빈 좌석에 앉았다. 전동차 안의 대다수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한참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바로 앞에서 산만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개를 슬쩍 들어 움직임의 진원을 확인했다. 한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어딘가 지루한 건지 아니면 지하철 안 풍경이 신기한 건지, 몸을 좌우로 왔다 갔다 꼬면서 사방을 구경했다. 간혹 몸을 너무 심하게 꼬면 다리를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 남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일단, 그는 남들보다 더 꼭꼭 야물딱지게 마스크를 쓴 듯 보였다. 마스크 밖으로 얼굴 살이 살짝 밀려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주변 소음을 차단한 나와 달리 그의 귀는 어떤 기기로도 막혀있지 않았다. 전동차 안의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지도 않았다. 그의 양손은 지하철 손잡이를 하나씩 움켜잡고 있었다. 등에는 까맣고 투박하고 커다란 가방이 헐렁한 기운 없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가방 지퍼에는 검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고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고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designed to help the planet


고리에 적힌 영어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 남자는 연신 배배 꼬던 몸을 멈추더니만 왼손을 내려 왼쪽 바지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폴더폰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출시됐을 법한, 작고 모서리가 둥근 폴더폰. 그는 엄지로 폴더를 탁- 열고 바로 탁- 닫고는 다시 왼쪽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시간만 확인한 것 같았다. 내게 호기심을 잔뜩 심어준 신기한 그를 좀 더 관찰하고 싶었지만 이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내 자리를 그에게 양보하고 전동차 안에서 내렸다.







며칠 뒤, 집 앞 카페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문득 그 남자가 떠올라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그의 산만했던 행동, 꼭꼭 쓴 마스크, 자유로워 보였던 귀, 거북이 등껍질 같던 가방과 천으로 된 고리, 고리에 적힌 'designed to help the planet' 문구 그리고 폴더폰.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한 친구가 말했다.


"그 사람, 고릴라 때문인가?"

"고릴라?"


뜬금없이 고릴라를 언급한 친구를 회동그래 쳐다보았다. 친구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잠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나에게 어떤 정보를 보여주었다.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 라는 책의 소개글이었다. 소개글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다.


'핸드폰, 세탁기, 냉장고, 나무젓가락, 화장지 등 우리 삶과 밀접한 물건들이 지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고릴라는 왜 핸드폰을 미워할까? 아프리카 콩고는 고온에서 잘 견디는 성질을 가진 탄탈의 주생산지이다. 이 탄탈이 핸드폰의 주요 부품 원료로 쓰이면서 값이 20배나 뛰자,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탄탈 광산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광산이 위치한 '카후지-비에가 국립공원'은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국립공원 안에 있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릴라 서식지도 황폐해졌다.'


이 글을 읽고나자 나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촤르륵 펼쳐졌다.


그는 환경보호자다. 그는 휴대폰을 새 걸로 바꿀 때마다 고릴라의 서식지를 황폐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십여 년 전부터 휴대폰을 바꾸지 않았다. 환경 보호를 위해 이어폰도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 가방에 멋을 위한 액세서리를 달고 싶어 친환경 원단으로 만들어진 천고리를 샀다. 그 고리에는 자신의 소신을 은근히 드러내는 문구 'designed to help the planet'까지 적혀있으니 안 달고 다닐 이유가 없다. 지하철에 탔는데 사람들은 전부 스마트폰 속 세상에 빠져있거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심취해있다. 이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그는 심심하다. 좌우로 몸을 돌려가며 자신과는 좀 다른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러던 와중 앞에 앉아있던 여자애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편히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내 상상 속 그는 고릴라와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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