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퍼피 Nov 01. 2020

타인의 힘

나쁜 연결



몇 년 전, 믿고 따르는 지인 K가 있었다. K는 나를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고 언제든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K와 함께 걸어가며 말했다. "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을 거예요." -사피엔스는 인간 역사와 미래를 주제로 한 벽돌책이다- K는 내 말을 듣자마자 '사피엔스는 김지원이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지식수준이 이 책을 소화할 만큼 높지 않다는 뉘앙스였다.

K의 단 한마디로 '사피엔스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가상의 법을 스스로 제정했고 나는 성실한 시민이니 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K의 말이 내 법전의 제1조가 될 만큼 K는 언제나 날 잘 안다고 자신만만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난 K를 전적으로 신뢰했으니까. 그날 이후 나는 사피엔스에 눈길은커녕 책날개조차도 들춰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나는 서점 매대에서 사피엔스를 발견했다. 매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그 책을 덥석 집었다. 계산을 하고 가방에 넣었다. 묵직해진 가방으로 인해 한쪽 어깨 근육에 무리가 가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벌써 사피엔스를 절반 넘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매일 밤 침대 끝에 양 무릎을 세우고 앉아 무릎 사이에 책 등을 껴놓고 신이 나게 읽고 있다. 어제는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책을 왜 여태껏 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떤 사실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지금 내 곁에 K가 없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단절됐다.






임상 심리학자 헨리 클라우드는 타인과의 연결을 4가지로 분류했는데, 그중 하나가 '나쁜 연결'이다. 나쁜 연결이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부정적이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과 연결되거나, 혹은 그런 사람에게 집착하고 끌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열등한 것처럼, 또는 어떤 결함이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K와 나는 나쁜 연결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그런 관계 속에서 K의 자신만만한 말은 나에게 책을 읽을 수 없게 하는 한계를 만들었고,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의 열등감과 결함을 느껴 그 한계를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던 거다. 이제 나는 K와 단절되어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남아있는 K의 잔재마저 흩어져나가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한계는 자신이 만들기도 하지만 타인이 만들어주기도 한다. 어쩌면 타인이 만들어준 한계가 더 견고하고 높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생각해보고 그 한계가 나에 의한 것인지 타인이 만든 것인지 실험실의 연구원처럼 세심하게 살펴보고 분류해봤으면 한다. 만약 타인이 만들어준 한계가 있다면, 그 타인과 내가 혹시 나쁜 연결로 이루어져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나쁜 연결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 사람과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거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조심스레 권해본다.







글을 끝내며 마지막으로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K에게 바치고 싶다.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점점 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간다."




작가의 이전글 "저분이 요조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