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연결
몇 년 전, 믿고 따르는 지인 K가 있었다. K는 나를 본인 스스로 잘 알고 있고 언제든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다. 그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K와 함께 걸어가며 말했다. "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을 거예요." -사피엔스는 인간 역사와 미래를 주제로 한 벽돌책이다- K는 내 말을 듣자마자 '사피엔스는 김지원이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지식수준이 이 책을 소화할 만큼 높지 않다는 뉘앙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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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단 한마디로 '사피엔스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가상의 법을 스스로 제정했고 나는 성실한 시민이니 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K의 말이 내 법전의 제1조가 될 만큼 K는 언제나 날 잘 안다고 자신만만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난 K를 전적으로 신뢰했으니까. 그날 이후 나는 사피엔스에 눈길은커녕 책날개조차도 들춰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나는 서점 매대에서 사피엔스를 발견했다. 매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그 책을 덥석 집었다. 계산을 하고 가방에 넣었다. 묵직해진 가방으로 인해 한쪽 어깨 근육에 무리가 가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벌써 사피엔스를 절반 넘게 읽어내려가고 있다. 매일 밤 침대 끝에 양 무릎을 세우고 앉아 무릎 사이에 책 등을 껴놓고 신이 나게 읽고 있다. 어제는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책을 왜 여태껏 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떤 사실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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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곁에 K가 없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단절됐다.
임상 심리학자 헨리 클라우드는 타인과의 연결을 4가지로 분류했는데, 그중 하나가 '나쁜 연결'이다. 나쁜 연결이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부정적이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과 연결되거나, 혹은 그런 사람에게 집착하고 끌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열등한 것처럼, 또는 어떤 결함이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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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와 나는 나쁜 연결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그런 관계 속에서 K의 자신만만한 말은 나에게 책을 읽을 수 없게 하는 한계를 만들었고, 나는 내가 가진 지식의 열등감과 결함을 느껴 그 한계를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던 거다. 이제 나는 K와 단절되어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남아있는 K의 잔재마저 흩어져나가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한계는 자신이 만들기도 하지만 타인이 만들어주기도 한다. 어쩌면 타인이 만들어준 한계가 더 견고하고 높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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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생각해보고 그 한계가 나에 의한 것인지 타인이 만든 것인지 실험실의 연구원처럼 세심하게 살펴보고 분류해봤으면 한다. 만약 타인이 만들어준 한계가 있다면, 그 타인과 내가 혹시 나쁜 연결로 이루어져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나쁜 연결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 사람과 천천히 한 발자국씩 거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조심스레 권해본다.
글을 끝내며 마지막으로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K에게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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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점점 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