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퍼피 Nov 03. 2020

모르는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



얼굴도, 나이도, 배경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준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나는 반년 동안 편지 답장 서비스 '아투와'를 해왔다. 온라인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글이든 받아 그 글에 손편지 답장을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는 일이다. 나는 다양한 글을 기대했다. 일상을 이야기하는 오손도손한 사연, 얼토당토않은 유쾌한 글, 고민을 토로하는 적잖이 무게 있는 글. 과연 어떤 글들이 왔을까? 사람들이 보내준 글은 비밀에 부치기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순 없지만, 단 하나의 글만 제외하고 전부 다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글이었다. 주로 무겁고 깊은 고민이다.

처음 답장을 쓸 땐, 고민을 보내준 상대의 입장이 완벽하게 되고자 빙의 연습을 무던히도 했다. 그 결과로 체력은 엄청나게 소진되었고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세수하면서 마음이 힘들어 울기도 했으니 말 다한 거다. 이 방법으로 해서는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고 말 게 눈에 훤했다. 방법을 바꿨다. 내 위치를 그 사람 쪽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원래 내 위치에 -위치는 내가 누구인지, 내 정체성에 따라 정해진다- 나를 고정하고 상대의 고민을 바라보는 거다. 위치는 관점과 직결된다. 그렇게 해서 생긴 내 관점으로 답장을 써서 전달했다. 답장을 쓰기 전에는 사전 파악이 필요했다. 상대가 보내준 글 속에서 그 사람의 고민과 심정을 파악할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을 노란색으로 표시했다. 사족은 흰색. 상대가 결국 내게 하고 싶은 말, 주된 고민을 분홍 글씨로 써서 정리했다. 보통 상대는 '그래서 내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못하는 걸 수도 있다- 문장 속에 꼭꼭 숨어있다. 그걸 찾아내거나 유추해야 한다. 이제까지 찾아내지 못한 글은 없다. 나름 그런 데 능력이 있나 보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답장을 써서 보냈다. 결과적으로 상대는 위안이 되는 만족스러운 답장을 받을 수 있었고 -사람들의 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내 정체성을 잃지 않고 좋은 답장을 쓰며 건강을 챙길 수 있게 됐다.





모르는 사람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절벽 끝에 놓인 사람의 팔을 기어코 찾아,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일이다. 모든 게 다 불투명하고 명확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가 놓인 위치와 실질적인 고민을 파악하고 그 고민에 관한 내 관점을 의연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의연하지 못하고 범박하게 우물쭈물하면 절벽 끝에 놓인 사람의 팔을 어루만지며 '더는 끝으로 가지 말아줘' 하고 연약하게 부탁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그 사람은 내 손을 뿌리치고 언제든 끝으로 뒷걸음질 칠 수 있다. 내 손길에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에게 글을 보내는 상대 또한 나의 얼굴도, 나이도, 배경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나에게 고민을 토로한다는 것은 당신이라도 내 손을 잡아 달라는 구조 신호다. 나는 그 신호를 받아야 하고 도와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나는 그보다 상대적으로 안전지대에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릴라는 핸드폰을 미워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