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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Nov 04. 2020

내가 미술을 그만둔 이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업으로 하고자 했다. 유치원생 때 아파트 1층에 있는 미술방에 다녔고, 초등학생 때는 1:1 미술 과외를 받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계원 예고에 가기 위해 입시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첫 수업 때부터 예고를 준비하는 중학교 3학년 언니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게 됐다. 가장 먼저 4B 연필 깎는 법을 배웠다. 그다음엔 곧바로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등 석고 소묘를 배웠다. 수업은 이렇게 진행됐다. 내가 먼저 석고상을 그리고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생각되면 학원 선생님을 부른다. 선생님이 오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에게 의자를 내주고 선생님은 내 자리에 앉아 나의 찌그러진 석고상을 수정해준다. 수정시간이 길어지면 나는 선생님 몰래 중3 언니들의 완벽한 소묘를 구경하며 속으로 감탄하곤 했다.






그렇게 미술학원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허리 디스크가 터졌다. 미술학원의 등받이 없이 작고 동그란 의자에 몇 시간 동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있던 게 원인이었다. 어딘가에 앉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허리를 구부리거나 옆으로 돌리지 못했다. 나는 그 고통을 예고 입시생의 자랑스러운 훈장이라고 생각하며 꾸준히 학원에 나갔다.


학원에 드나드는 게 익숙해진 시점부터, 남자 원장 선생님은 나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실수를 하거나 그림을 유난히 잘 못 그리는 날이면 그랬다. 여자의 고함보다 남자의 고함이 더 무섭고 몸이 덜덜 떨리는 거라는 걸 그때 알았다. 원장 선생님의 고함을 계속 듣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지우개를 이젤에서 떨어뜨리는 것마저도 고함을 들을까 발이 덜덜 떨리는 지경까지 다다랐다. 내가 잘하지 못하고 덜렁거리니까 원장 선생님이 고함을 지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꾸준히 학원에 나갔다.


학교에서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 S가 내가 다니는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게 됐다. S도 예고 입시를 일찍부터 준비하고자 했던 터라 나와 같이 중3 언니들과 한 공간에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S보다 1시간 일찍 와서 1시간 더 빨리 집에 갔다. 어느 날, 학교에서 S는 할 얘기가 있다고 나를 불렀다. S는 나에게 '미술 학원에서 같이 그림 그리는 중3 언니들이 내가 집에 가면 내 뒷담화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어떤 뒷담화인지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선크림을 진하게 발라서 얼굴 하얀 게 역겹다. 치마도 무릎 위로 올라온 걸 입는다. 그림도 못 그린다.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하필이면 그날은 학원에 가는 날이었다. 중3 언니들이 무서워져 학원에 가는 게 두려웠다.


시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미술학원에 갔다. 그제야 보였다. 내가 들어오면 중3 언니들은 어딘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내 얼굴을 한 번 쓱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내가 그림을 다 그리고 선생님을 부르면 내 그림을 슬쩍 확인하고는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큭큭 웃는 것을. 내가 집에 갈 때 '안녕히 계세요' 하고 말하면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는 것을.






여태껏 몇몇 고난이 불어닥쳐도 꿋꿋하게 미술학원에 나갔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에게 미술학원에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통보와 감출 수 없는 어두운 표정에 엄마는 안 좋은 낌새를 눈치채고 "너 무슨 일 있지." 라며 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울음을 빵 터트리며 허리 아픈 것도 고통스러운데 학원 언니들이 내 욕을 하고 원장 선생님은 고함을 지른다는 사실을 와르르 토해냈다. 꺽꺽거리는 나를 뒤로한 채 엄마는 곧바로 학원에 전화했다. 원장 선생님이 전화를 받자 엄마는 내가 털어놓은 사실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길길이 화를 냈고 마지막엔 그만두겠다 소리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엄마는 다른 학원을 알아봤지만 나는 성적을 올리겠다는 말을 하며 미술학원에 다니는 일을 이리저리 피했다.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어떤 미술학원을 가도 내게 두려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다녔던 미술학원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원장 선생님이나 중3 언니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내게 보복을 하지 않을까 불안한 상상을 하며 몸을 움츠리며 서둘러 걸었다. 결정적으로 이 트라우마는 미술을 하고 싶다는 열망마저 사그라들게 했다.


4층짜리 상가에 있던 작은 입시미술학원, 그 공간에서 어쩌다 생긴 일들로 인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미술을 그만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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