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랑-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나는 원고를 정리하던 일을 멈추고 손님에게 인사했다. 손님은 온 벽면이 -작은 수납함이 수백 개나 있는- 서랍장으로 되어있는 공간을 신기하게 쳐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작가의 서랍(가게 이름)이 뭐하는 데예요?"
내 가게에 하루 평균 방문하는 손님이 50명이라면 49명은 도대체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물어본다. 나는 그때마다 손님 곁으로 다가가 직접 설명을 한다. 예전엔 이 일이 에너지가 꽤 많이 소모되어 가게를 설명하는 리플렛을 만들고 물어볼 때마다 나눠드릴까 생각도 했지만 관뒀다. 이 공간을 텍스트로 설명하기엔 가게의 정체성과 진심을 적확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의자에서 일어나 손님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문학 공모전에서 낙선한 신인 작가 혹은 작가지망생들의 원고를 파는 낙선 원고 상점이에요. 여기 서랍마다 작가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요. 궁금한 작가님의 서랍을 자, 이렇게 열어보면.. 보이시죠? 서랍 안에 작가님의 낙선 원고 종이가 들어있습니다. 서서 훑어보셔도 되고 저기 있는 소파에 앉아서 천천히 읽어보셔도 돼요. 혹 마음에 들어서 구매를 원하신다면 카운터로 가져와 주세요. 서랍 속 원고는 관람용이라서 판매용 새 원고를 드릴게요."
아아 그렇구나. 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에 쓰여 있는 작가들의 이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손님에게 가게 이해시키기' 임무를 완수한 나는 자리로 돌아가 쌓여 있는 원고를 마저 정리했다. 스윽. 스윽. 손님이 작가들의 서랍을 열어보는 소리가 들린다. 10분이 지나자 소파에 앉아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고 10분이 더 흐르자 카운터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과 눈을 맞추었다. 손님은 내게 관람용 원고를 내밀었다.
"강해수 작가님 원고 살게요."
"네, 새 원고로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 그런데 여쭤볼 게 있는데요. 왜 하필 낙선 원고를 파시는 거예요?"
50명 중 25명이 묻는 질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좀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시간이다.
"문학 공모전에서 낙선한 원고 가운데엔 전문가들의 합의제 심사로 놓치기 쉬운 뛰어난 작품들이 있어요. 심사자의 주관적인 평가를 평균 내는 방식이라면 더욱이 괴짜 천재의 글은 뽑지 못합니다. 이렇듯 낙선 원고 중에는 빛을 발하지 못한 작품들이 무수히 존재해요. 저는 이런 유망한 작가들의 다양한 낙선작을 많은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가게를 열게 됐죠."
손님은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모범생 같은 손님의 자세를 보자 다른 말을 추가로 덧붙이고 싶은 어떤 용기가 생겼다.
"저는 이 공간을 단순히 낙선 원고만 파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낙선한 작가에게는 자기 글이 독자와 만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글이라는 희망을 부여함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을 주는 공간이라고 여깁니다. 독자에게는 누군가의 심사를 거치지 않은 신선한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지요."
"그렇네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왜 가게 이름을 '작가의 서랍'이라고 지으셨어요? 가게 내부도 죄다 서랍장이고.. 서랍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작명 스토리는 단순해요. 아는 작가님이 낙선한 원고를 자신의 서랍 속에 넣어 둔다고 하시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서랍 속 낙선 원고를 세상에 꺼내 보이자는 다짐을 했어요. 그렇게 저는 이 낙선 원고 상점의 이름을 '작가의 서랍'으로 지었죠."
손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결제를 하고 가게 로고 도장이 찍혀진 크라프트 종이백에 새 원고를 담아 손님에게 건네주었다. 종이백을 소중하게 품에 안은 손님은 내게 간단한 눈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갔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작가들의 낙선 원고를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낙선 원고 상점 '작가의 서랍'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2019년 시각디자인학과 졸업전시 작품으로 만든 가상의 브랜드이다. 장강명 작가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을 읽고 브랜드 기획의 뼈대를 잡았으며, 실제 작가들의 대면 인터뷰를 통해 살을 덧대었다. '작가의 서랍'을 전시한 후 실제로 생긴다면 좋을 것 같다는 사람들의 평과 함께 직접 이 가게를 차려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 정말 해볼까? 솔깃했지만, 혼자서 작가들을 컨택하고 낙선 원고를 받는 데까지 많은 장애물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잠시 생각을 접어두었다. 아직은 이렇게 '작가의 서랍'을 머릿속에서 실체화해 허구의 소설을 쓰는 거로 만족한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