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퍼피 Nov 12. 2020

흰 백지, 그 두려움에 관하여.




TV에서 한 외국인 작가가 워드 프로세서에 원고를 쓰는 장면이 나왔다. 그녀는 흰 백지에 검은 활자를 타이핑해나가는데, 검은 활자 뒤로 남겨진 망망대해 같은 흰 여백이 무서워 보이더라. 저 넓은 공간을 쪼그마한 검은 활자로 언제 다 채우지?라는 걱정은 둘째치고 그저 채워짐을 기다리고 있는, 아무것도 없는 흰 여백의 덤덤한 모습이 두렵더라.


(*여기서 백지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비어 있는 종이'를 말하고 여백은 '종이 따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 자리'를 의미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나는 백지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롭고 가능성 넘치는 공간이라고 배웠고, 흰 여백은  그 상태로도 디자인 요소가 된다고 배웠다. 여백을 어디에 얼마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작품의 인상이 변하기 때문에, 디자인할 때 여백은 이리저리 굴리고 재밌게 가지고 노는 요소다. 나는 디자인할 때만큼은 백지가 두렵지 않고, 여백을 보면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 신이 난다.


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다르다. 워드 프로세서를 처음 열었을 때, 아무것도 없는 하얗디 하얀 백지는 죽창을 들고 빳빳하게 서 있는 병사처럼 보인다. 함부로 건드릴 수도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다. 어찌어찌 그 병사를 물리치고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을 해나갔다고 치자. 그럼 이젠 활자 뒤로 남겨진 흰 여백이 두렵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온갖 부담감이 밀려온다. 그냥 흰 공간 자체가 무서운 것이다.


'나는 지금 백지 앞에 놓여 있다. 놓여 있는 것은 백지가 아니라 나다.' -박연준 시인


흰 백지 앞에 난 무력한 존재가 된다. 그럼 글을 어디에다 쓰느냐고? 노션(메모 프로그램)에 글을 쓰는데 무조건 다크 모드로 설정한 뒤에 쓴다. 다크 모드를 적용하면 흰색이었던 배경이 어두운 회색빛으로 바뀌고 텍스트가 흰색으로 변한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흰 활자를 채워나가는 건 무섭지 않다. 부담스럽지도 않다. 검은 여백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어떤 글이든 쭉쭉 써 내려간다.






왜 나는 글을 쓸 때 흰 백지를 무서워하고 먹지에 안도감을 느낄까? 단순히 빛이 눈에 주는 영향으로 따져보았을 때 흰색이 눈을 피로하게 하고 검은색은 상대적으로 덜 피로해서? 아니. 내 신체를 피로하게 한다고 그 대상을 두려워하진 않아. 그렇담 참신한 관점으로 생각해 본다면.. 깨끗한 백지를 검은 활자로 시커멓게 조져 놓는 것보다 어둠이 깔린 공간을 하얀 글자로 환하게 비추는 게 좋아서? 아니. 이건 너무 한쪽으로 혐오가 치우쳐져 있어서 이유로 삼기에는 찝찝하고 거북해.


그럼 도대체 뭔데? 혼자서 하는 사유에 지친 나는 인터넷의 도움을 받기로 결단을 내렸다. 눈알을 대룩대룩 굴리며 이것저것 찾아보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진행된 조사에 따르면 흰색은 색채가 완벽함, 선량함, 정직성, 청결감, 시작점, 새롭고 중립성 및 정확성과 가장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문장에서 시선이 멈춘 단어는 '완벽함'과 '시작점'이다.


나는 무언이든지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시작을 두려워한다. 처음은 늘 어설프고 부족한 법인데, 그렇게 해버리는 내 모습을 보기가 죽도록 싫어 시작을 두려워한다. 처음부터 만족감을 느끼지 않으면 즉, 완벽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거나 중간에 가차 없이 그만둬버린다. 그렇게 '완벽'과 '시작'이 짝을 이루면 이를 바라보는 나의 기본적인 심상은 두려움이다. 이제야 납득이 가는 이유를 발견한 것 같다.


나는 워드 프로세서든 라이트 모드의 노션이든 흰 백지를 보면 처음부터 완벽하게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감정은 두려움과 무서움. 그래서 내가 노션의 다크 모드로 호다닥 도망갔던 거구나. 그곳에서 안전한 느낌을 받으며 글을 썼던 거구나. 검은색은 완벽함과 시작점을 내포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심리적으로 편안함과 보호감을 주니까 하찮은 글이어도 마구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거구나.


글을 쓸 때 배경색에 따라 감정이 변하며 행동에도 영향을 받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나약하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색, 그게 뭐라고.


이제 두려운 이유를 알게 됐으니까, 언젠가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흰 배경에 편안하게 글을 쭉쭉 써 내려가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슬쩍 가져본다.


그 날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아도, 어딘가 부족한 채 시작해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겠지.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죽음 이후로 '엄마'란 단어에 극도로 민감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