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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Jan 14. 2021

나에겐 복잡한 행동, '도움'



집으로 가는 길, 건널목 앞에서 파란불이 켜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 왼편에서 주황색 자전거를 타고 오던 한 남자아이가 옆으로 핸들을 꺾다가 악! 소리를 지르며 우당탕 넘어졌다. 자전거에 깔려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다가가려다 멈췄다. 아이가 곧바로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댔기 때문이다. 그 발버둥에 나의 도움까지 합산되면 난장판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아이의 필사적인 버둥거림은 '나 혼자 할 수 있으니 내버려둬'라는 듯이 보였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고 아이도 금방 일어났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내 앞으로 휑 지나쳐 가는 그 아이의 등을 보니 '난리 나더라도 도와줄걸' 하고 옅은 후회가 들었다. 집에 도착해서까지 미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내가 그 아이에게 이기적이고 정없어 보이진 않았을까 미약한 걱정이 일었다. 아까 전만 해도 아이는 도움이 필요 없을 거라고 스스로 판단했으면서.


얼마 전에도 약국에 가다가 약국 앞 계단을 천천히 그리고 힘겹게 내려오는 할머니를 보고, 도와드릴까? 팔 좀 잡아드릴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고작 계단 세 칸을 내려오는 건데, 젊은이의 도움까지 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실 할머니일 거라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도와드리지 않은 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냥 좀 도와드릴 걸 하는 후회가 들더라.


나는 매번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상대방의 마음을 멋대로 예측하고 도움 주기를 포기한다. 그리고는 후회한다. 이건 지인이 아닌 모르는 사람에 한정된 변덕이다. 나는 이 변덕이 왜 생기는지 안다.






도움. 도움이라는 행동에는 상대에 대한 동정심과 안쓰러움이 어느 정도 기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을 돕는 것보다 모르는 사람을 도울 때 그 감정은 더 명백해진다. 내가 도우려다가 이내 마음을 돌려버리는 행동은 상대에게 동정심과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걸 그가 알아차릴까 봐, 그런 감정을 본인에게 품고 있는 게 언짢을까 봐 그게 두려워서 파생된 행동이다.


그러나 이 예측은 나 자신에 대입해보면 빗나간다. 내가 길을 걷다가 넘어지거나 무거운 짐을 가지고 경사진 곳을 올라갈 때, 타인이 나를 선뜻 도와준다면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거다. '내가 동정을 받는구나, 안쓰럽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고 행여 든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거다.


대체 왜 이런 아이러니가 생기는 걸까. 곰곰 고민해보니 원인은 도와주는 상대의 위치에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다가 내 기준에서 사회적 약자라고 판단되는 존재면 오히려 더 돕기를 망설인다. 내 기준 사회적 약자는 어린이, 노인, 장애인이다. 그 위치에 있는 이들이 '경미한' 어려움에 처해있으면 더욱이 망설임은 비대해진다. (큰 어려움에 처했다면 망설임 없이 도울 것이다) 난 이 망설임 또한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그 진원지를 안다. 내가 중학생 시절, 약자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도우려 한다면 그건 오히려 그들을 차별하는 것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 말이 내 마음 깊숙이 침투됐었다. 그 말을 듣기 바로 이전엔 경미한 어려움에 놓인 장애인을 선뜻 도우려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한 상황이 있었다. 어렸던 난 그 거절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얻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 말이 내겐 법어처럼 진득하게 새겨졌다. 그게 여즉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도 난 생각이 어리지만, 그래도 중학생 시절보다 커진 머리로 따져보면 다 모호하고 완전히 정확하지 않은 기준과 판단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약자는 실상 자신을 약자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며 '경미하다'는 어려움의 척도도 너무 주관적이고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해서 타인의 도움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이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멋대로 판단한 예측에 갇혀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정말 도움을 바랐을 이가 분명 있을 거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 한편이 편치 못하다.






이쯤 되니 스스로 검열이 심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허나 뭐가 됐든 도움이라는 행위는 사유하면 할수록 나를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도 이 사유가 별 소득 없이 마무리 지어지는 건 아니다. 그 와중에 한가지 명확한 결론을 내린 게 있다.


모르는 사람을 선뜻 돕는 이는 장애물처럼 턱턱 걸리는 무수히 많은 고민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는 것이겠지. 그런 사람은 타인의 어려움을 나눠서 지고, 거절 또한 덤덤히 받아들이는 성숙하고 큰사람이겠지. 나는 아직 겁이 많고 작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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