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놀이터에 가기 위해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파트 5층에 살고 있었던 저는 집을 나설 때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 그 언저리에 멈춰있으면 종종 비상계단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는 층수를 재빠르게 확인하고는 곧장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지요.
비상계단이 있는 한쪽 벽에는 창문이 나 있었습니다. 난 방향이 남향이었는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유난히 강렬해 해를 직접 보지 않아도 눈가가 시근거렸습니다. 평소였다면 눈을 잔뜩 찌푸리고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 내려갔을 텐데 그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창틀에 참새 한 마리가 뜨거운 햇볕을 온전히 받은 채로 오도카니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레 창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휘리릭 날아가 버리는 여느 참새들과 달리 창틀의 참새는 미동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몸은 약간 기울어져 있었고 좁쌀만큼 작은 눈은 반쯤 감고 있었습니다. 저는 양손을 뻗어 참새를 들어 올렸습니다. 6살의 작은 손안에 들어온 참새는 금세 옆으로 픽 쓰러졌고 눈을 꾹 감았습니다. 그런 참새를 집으로 고이 가져가 화장실에서 몸을 씻겨주고 아파트 밖 화단에 묻어주었습니다. 이게 제가 인생에서 첫 번째로 죽음을 목도한 일입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죽어가는 새를 손안에 담았을 때부터 화단에 묻어줄 때까지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습니다. 마치 장례를 해봤던 것처럼요.
그 이후로 나이를 먹으며 몇 차례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두 번째로 죽음을 마주한 건 13살 때였고, 외할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친밀했던 외할머니의 죽음은 얼떨떨하고 슬펐습니다. 하지만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던 때라 공부에 집중해야만 했고 그래서인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세 번째로 죽음을 마주한 건 17살 때였고, 엄마의 죽음이었습니다. 아침에 밥을 차려주며 하교할 때 학교로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한낮에 뇌출혈로 쓰러지셨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러워 슬픔보다 충격이 더 컸습니다.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잘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네 번째로 죽음을 마주한 건 22살 때였고, 15년을 함께한 강아지 찌르의 죽음이었습니다. 찌르는 죽기 전 1년 동안 병마와 싸웠고 저는 찌르가 죽어가는 걸 함께했습니다. 마음의 준비도 해두었지만 찌르의 죽음은 여태 겪었던 어느 죽음보다 더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저는 어떻게 된 게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죽음에 취약해집니다. 또 다른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할까 봐 두려움에 떱니다. 이제는 그 두려움이 저 자신에게도 옮겨왔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죽음도 두려워지기 시작한 거죠. 자다가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깔려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택시나 버스를 탈 때도 교통사고가 나서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합니다.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대부분의 날을 살아갑니다. 지인들에게 나는 죽는 게 무섭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합니다. 어릴 적 가장 무서운 것이 귀신이었다면 지금은 저의 죽음입니다.
어제는 예전에 쓰던 핸드폰을 노트북에 연결해서 사진첩을 구경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과거 여행을 하며 즐거워지고 싶은 날. 어제가 딱 그랬습니다. 핸드폰 안에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사진부터 3년 전 사진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몇천 장이 넘는 사진과 동영상을 구경하는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지금도 설명을 못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상했습니다. 즐거워지려고 예전 사진들을 본 건데 수상한 기분에 빠져버렸습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다 손거울을 들어 제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노트북에서 보던 나의 얼굴과 지금 보고 있는 나의 얼굴이 달랐습니다. 주름이 생기거나 눈코입의 모양, 얼굴의 골격 등 물리적인 형태가 달라진 게 아니라, 풍겨 오는 분위기와 눈빛이 달라져 있었달까요. 분명 얼굴은 같은데 저기 저 노트북 속 김지원은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하기만 한 생기 넘치는 에너지를 내뿜고 있고, 거울 속 저는 뭘 많이 알아버려 이전보다는 지혜로워 보였는데 그게 생기 넘친다기보단 오히려 생기가 없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변화를 인식하자마자 마음이 붕 떠올랐고 모든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에세이를 써야 하는데 키보드에 손을 올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에세이를 못 쓰겠으니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에 집히는 아무 책이나 펼쳤는데 단 한 문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안절부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어떤 판단이 섰습니다. 이 모든 걸 잠재우기 위해선 울어야 한다. 울어야지 이 이상한 기분이 해결될 것 같다. 저는 울었고, 운 다음에는 따뜻한 차를 홀짝홀짝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조용한 노래들을 골라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기분은 여전히 마음속에서 자맥질하고 있었습니다. 곧바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격렬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붕 뜬 마음을 내려 앉히려고 미친 사람처럼 애를 썼지요.
1시간 동안의 운동을 끝마친 후 샤워를 하고 나오니 어느 정도 진정이 됐습니다. 그러나 해결됐다는 후련한 기분보다는 잠시 뒤로 미뤄둔 것 같은 찝찝함이 들었습니다. 저는 거실에 있는 언니들 -같이 사는 두 명의 피 다른 언니들, B 언니와 N 언니- 에게 뚜벅뚜벅 걸어가서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 울었어." TV를 보고 있던 언니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언니들의 동그란 눈동자를 보며 아까 겪었던 이상한 감정에 대해서 차근차근 풀어놓았습니다. '처음엔 즐거우려고 예전 사진들을 보게 됐다'부터 시작해서 '사진을 다 보고 나자 이상한 감정이 들었고 그러던 와중 거울을 봤는데 얼굴이 달라져 있어서 마음이 붕 떴다'고 말한 뒤 잠깐 울었습니다. 아주 잠시였습니다. 눈물을 멈추고 곧이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별별 노력을 했지만, 아직도 여전하다'고 마무리 지으며 길고 긴 넋두리를 끝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N 언니는 제게 말했습니다.
"지원이는 늙는 게 무섭구나."
내가 늙는 걸 무서워한다고? N 언니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 위로 물음표가 그려졌다가 이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머릿속에서 파편으로 둥둥 떠다녔던 생각과 감정들이 착착착 일렬로 정렬됐습니다. 정렬된 결과물은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무서워하는 건 나의 죽음이다. 늙는다는 건 죽어간다는 의미다. 아까 전 나는 과거 사진을 보다가 현재 얼굴을 보자 노화를 온몸으로 느꼈다. 나의 무의식은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그래서 마음이 붕 떠 내려앉지를 않았던 거다.
꼭꼭 숨어있고 어지럽게 퍼져 있던 제 안의 생각과 감정들이 정리되자 그제서야 마음이 진정됐습니다. 이건 내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붕 뜬 건지 원인을 알아내어 진정이 된 것이지,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진정된 게 아닙니다. 아직 저는 저의 죽음이 무섭고, 제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겹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 살아가다가 주름이라도 한 줄 생기는 날에는 꼬박 일주일은 두려움에 잠식당해 아무것도 못 할 지경이 될 겁니다. 저에겐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다.
유럽 뱀장어 앙귈라 앙귈라(Anguilla Anguilla)는 사르가소해(Sargasoo Sea)라는 북대서양 지역에서 태어납니다. 뱀장어는 성장하면서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자신의 집을 정하고 긴 삶을 살아갑니다. 15~30년쯤 되면 뱀장어는 번식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이 결정은 어떻게 촉발되는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뱀장어는 산란을 위해 다시 사르가소해로 돌아옵니다. 돌아가는 여정 중 뱀장어의 소화기는 활동을 정지하고 위가 녹아 없어집니다. 몸은 곤이와 이리로 가득 찹니다. 사르가소해에 도착하면 뱀장어의 알이 수정됩니다.
뱀장어는 삶의 주요 목적이 산란입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뱀장어는 산란을 하면 죽는다는 겁니다. 뱀장어에게 죽음이란 삶의 임무 완료, 즉 삶의 완성입니다. 뱀장어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건 명백히 자살이지만, 더는 사는 의미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닌 삶의 목적 '산란'을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뱀장어에게 죽음은 완성입니다. 그 죽음은 영광스럽고 찬란하기까지 합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철저히 거세한 앙귈라 앙귈라 뱀장어가 보고 싶습니다. 뱀장어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싶습니다. 불가능하겠지만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 관해 뱀장어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그럼 저는 어느 현인의 말을 듣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조용히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