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게

by 김퍼피

안녕하세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네요. 그보다 앞서 저에게서 당신을 떼어 놓는 일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김지원', 제 이름입니다. 당신이 제 이름이 된 건 당신의 의지도 저의 의지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부모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지요. 우리는 서로 영문 모른 채 만났고, 평생 함께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당신 없이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당신을 알려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성격은 어떻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등 저에 관한 모든 걸 낱낱이 말해도 당신을 모르면 저는 완성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알게 되면 제가 필요할 때 당신을 부릅니다. '지원아, 이것 좀 해줘.', '지원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지원아, 이리 와 봐'. 저는 당신 대신 대답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형태가 없어 말을 하거나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얼핏 보면 저에게 당신이란 옷이 입혀진 거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당신이 주체고 제가 당신의 옷일지도 모릅니다.


저에게 이토록 중요한 당신을 어렸을 땐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저는 당신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초등학교 2학년 때는 가족들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이제부터 나를 김지원이 아닌 김초연으로 불러줘'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김초연은 저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름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가족들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황당함을 넘어 쟤가 지금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이었어요. 가족들은 단 한 번도 저를 초연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당신을 싫어하는 마음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줄어들었다고 좋아하게 됐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아무런 감상이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난생처음으로 당신이 좋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잠시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2018년 2월, 요조 언니가 -뮤지션이자 책방 주인- 제주도에서 운영하는 책방에 갔습니다. 요조 언니의 팬이었던 저는 책을 구매하면서 팬레터도 함께 전해드렸죠.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 나름 치열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제주도에서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한 계간지에서 요조 언니가 쓴 글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지원에게'였고 내용은 제가 책방에서 건네드린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황홀한 기분으로 요조 언니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저를 향한 요조 언니의 모든 글이 좋았지만, 개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바로 제목이었습니다. 지원에게. 이 네 글자를 눈으로 한참 어루만졌습니다. 지원에게. 지원에게. 지원. 지원. 지원.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니 어느 순간 미시감이 들면서 동시에 '지원'이라는 이름이 무척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저에게 당신은 너무도 평범한 존재였는데, 제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을 불러주니 이토록 특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꿈같은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한동안이요.


최근에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일하다가 실수를 하여 혼잣말로 "미쳤어. 김지원."이라고 소리 내 말했는데 갑자기 어떤 이질감이 큰 파도처럼 저를 덮쳤습니다. 이 이질감을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형용해보자면, 마치 신발을 보고 칫솔이라 부르는 것처럼 어색하고 낯설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을 멈추고 이 기분이 왜 드는지 원인을 찾고자 골몰했습니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게 낯간지러워서 그런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확실히 낯간지러움과는 전혀 다른 결의 기분이라 지인들의 대답은 제게 명쾌한 해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혼자서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과 나는 평생을 *자타미분화(自他未分化) 관계로 살아와서 단 한 번도 둘로 구분된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 내 이름 석 자를 불렀을 그때 당신은 내게서 분리되어 타자화된 것이 아닐까. 저는 이 가정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서 깨달았죠. 저는 당신과 나를 분리할 수 있다는 걸요. 나에게서 분리된 당신에게 인격을 부여해서 말을 걸 수 있다는 걸요.


아마 대다수는 이런 발상을 한 적 없을 겁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스스로 불렀을 때 묘한 기분이 든 적은 왕왕 있었을 테지만 그 기분을 파헤치려고 들지 않았을 거고, 파헤쳤다고 해도 자신과 이름이 분리돼서 그랬다는 결론은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부력의 원리를 깨우친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를 외치고 싶습니다만, 이 판단은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라 두 팔을 들고 소리치기엔 사뭇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럴 수 있다는 것-자신과 이름을 분리시켜서 이름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 이걸 읽는 독자는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요. 물론, 저의 가정과 깨달음을 일리 있게 받아들일지 말지는 독자의 선택이겠지요.


당신에게 쓰는 편지가 사실은 독자에게 저의 경험을 공유하려는 수단이었다는 게 퍽 서운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요, 당신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있어서 편지를 쓰게 된 것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드리고 편지를 차차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당신의 수명은 같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보다 더 짧은 생을 살다 갑니다. 우리는 평생 함께할 것을 서약했으니 제가 죽으면 당신도 죽을 거라 생각하셨을 테죠.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린가 싶으실 겁니다. 사실 그 평생은 제 삶을 기준으로 한 '평생'입니다. 제가 죽어 육체와 정신이 사라져도 당신은 살아있습니다.


그건 우리 후손들 때문입니다. 후손들은 제가 죽어도 당신을 기억하고 부릅니다. 특히나 제 묘비에 당신이 새겨진다면 더 오랫동안 불리게 될 가능성이 크겠죠. 그만큼 당신의 수명은 늘어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당신을 완전히 잊거나 더는 제 묘비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연히 죽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의 수명은 우리 후손들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함의는 사람은 살아생전에 훌륭한 일을 하여 후세에 빛나는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은 영원과 가까운 시간을 살겠죠.


미안합니다. 저는 당신을 영원히 살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피나는 노력을 해서 미래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겠죠. 그러나 저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의지도 없습니다. 적당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고 당신도 적당히 살다가 사라졌으면 싶습니다. 불멸은 영광스럽지만 실은 지극히 외로운 삶이거든요. 당신도 제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거라 믿습니다.


분명 아침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다 써놓고 보니 하늘이 어둑해져 있습니다. 당신을 제게서 떼어 놓는 것도 처음이지만 반나절 동안 당신만 생각한 것도 처음입니다. 당신과 더욱 돈독해진 기분입니다. 우리 사이가 가까워지면 요조 언니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저는 당신을 좋아하게 되겠죠? 앞으로 종종 당신에게 말을 걸겠습니다.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쓰면서 저는 이미 문고리를 잡았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와 엄마 사이에서 형성되는데, 아이가 자신을 안고 있는 엄마와 자기를 둘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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