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by 김퍼피

노트북을 켜놓고 이번 에세이는 무엇에 관하여 쓸지 내내 생각만 하다가 5일 만에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이 한 줄을 쓰는 데 5일이나 걸렸습니다. 무려 5일이라고요. 그 5일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생각만 했는지 아십니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당신에게 쓸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소재를 찾았습니다. 가지고 있는 산문집을 책장에서 전부 다 빼내어 두 눈을 부릅뜨고 읽었습니다. 몇 년 동안 모아뒀던 일기장을 서랍에서 전부 다 꺼내어 두 눈을 부릅뜨고 읽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 티스토리, 에버노트 등 온라인 블로그에 업로드한 기록물을 전부 다 클릭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읽었습니다. 허나 소득은 단 한 개도 없고 두 눈알만 미친 듯이 욱신거립니다. 젠장맞을꺼.


저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글을 쓰고자 매일 노력하고 고심했는데 노트북 속 빈 화면은 저보고 허송세월하였다며 조롱합니다. 억울한 마음에 노트북을 쳐다보고 싶지 않아 노트북 뒤에 놓여있는 화병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화병에는 친구가 준 노란 프리지아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에게 건네받을 당시 프리지아는 연둣빛의 작은 봉오리 상태였습니다. 매일 찬물을 갈아주고 햇볕을 쐬어 주니까 봉오리가 점점 오동통해지더니 이제는 노랗게 만개했네요. 몇몇 꽃송이는 만개 그 이상이 되어 꽃잎이 자글자글해졌습니다. 프리지아는 시든 꽃송이를 잘라내면 봉오리가 계속해서 피어난다는 한 플로리스트의 말이 떠오릅니다. 저는 문구용 가위를 집어 들고 자글자글 주름진 꽃송이들을 잘라냅니다. 가위질을 할 때마다 탁- 탁- 냉정한 소리가 귓가를 찌릅니다. 사각사각 싹둑싹둑 같은 동심 어린 소리였다면 지금 제가 느끼는 죄책감이 덜했을 겁니다.


한껏 노랗고 만개했지만 주름진 꽃대가리들이 책상 위에 잔뜩 쌓여있습니다. 쌓인 모양새가 마치 무덤 같습니다. 화병에 담긴 프리지아 줄기에는 연둣빛의 작은 봉오리와 인위적으로 잘린 꽃자루만이 남아있습니다. 목이 잘려 무덤을 이루고 있는 늙은 꽃송이들과 화병에 담긴 싱싱한 봉오리들을 번갈아 봅니다. 어떻게 된 게 죽은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오히려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린 봉오리를 피우려면 전성기가 지나 자글자글해진 꽃송이를 떼어내야 한다는 사실에 조용히 분개합니다.


이러다가는 화가 저를 잠식할 것 같아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섭니다. 집 앞에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가 있지만 다 걸으면 5분밖에 되지 않아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돌기로 합니다. 햇빛을 받고 상쾌한 바람을 맞으면 당신에게 할 말이, 글 소재가 생각나겠지 라는 희망을 품은 채 원래 걷는 속도보다 천천히 걷습니다.


10분가량 걸었을까. 제 앞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한 가족이 보입니다. 아빠와 엄마 사이에 몽땅연필만 한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여자아이는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분홍 패딩을 입었으며 흰 스타킹과 검은 구두를 신었습니다. 아이는 신이 났는지 두 발을 동시에 깡충깡충 뛰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가족을 뒤따라 가고 있는 저는 아이의 발걸음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상념에 잠깁니다. 나도 저렇게 두 발을 높게 뛰며 걸어본 적이 있던가. 아주 어렸을 때 말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돼서도 깡충깡충 뛸 만큼 신이 나는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두 발이 공중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는 마찰력이 그립습니다.


어쩌다 보니 가족을 앞질러 갑니다. 자신은 신나는 일이 없는데 잔뜩 신이 난 어린아이를 보고 샘이 나서 앞지른 건 절대 아닙니다.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는지 집 앞 작은 상가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익숙한 건물을 괜히 한 번 쭉 둘러보고 지나치려는데 상가 뒤편 가장 구석진 곳에 '비건'이라 적혀진 선간판을 보고 걸음을 멈춥니다. 그 선간판을 향해 다가가니 '10월의 비건테이블'이라는 간판을 단 작은 매장이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 비건 음식점이 있었다니!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주저 없이 매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매장 안에는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세 개밖에 없고, 진열대에는 비건 쿠키밖에 없습니다. 쿠키 종류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무엇이 맛있을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제게 말을 겁니다. "버거와 샌드위치도 있어요." 버거는 딱히 끌리지 않아 샌드위치의 종류를 물어보았습니다. 애플 샌드위치와 머쉬룸 샌드위치가 있답니다. 저는 머쉬룸 샌드위치를 포장 주문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니 저기 앉아서 기다리랍니다.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사장님이 가리킨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는 사장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왜 10월이에요?"



매장 이름을 왜 '10월의 비건테이블'이라고 지었는지 여쭤본다는 걸 앞뒤 다 잘라먹었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용케 알아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오전에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손님이 똑같이 물어보셨어요."

"아 그래요?"

"네. 왜 10월이라고 지었냐면, 이 가게가 10월에 오픈하기도 했고, 제가 10월을 좋아해요."

"아아."

"10월에 황금빛 들녘이 너무나 아름답잖아요. 또 10월 하면 넉넉하고 풍요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그렇네요."

"버섯 좋아하시면 많이 넣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사장님은 샌드위치를 만들다 말고 제게 쿠키 한 개를 서비스로 주었습니다. "드셔 보세요. 맛있어요." 그 말이 왠지 지금 먹어보라는 신호인 것 같아 포장지를 뜯고 한 입 크게 베어 뭅니다. 아니 근데, 제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건포도가 들어있는게 아니겠습니까. 혀 위에 있는 건포도를 어찌할 줄 몰라 입을 우물거리고 있으니 사장님은 그런 저를 보고 환히 웃으며 "맛있죠?" 묻습니다. 저는 그 미소에 건포도를 꿀떡 삼키며 "완전 맛있어요." 대답했습니다. 사장님은 뿌듯한 표정입니다. 타인에게 저리도 좋은 기분을 선물할 수 있다면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 정도야 기꺼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드디어 샌드위치가 든 포장 용기를 받아들었습니다. 카드로 계산하니 곧바로 핸드폰에 문자가 옵니다.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이 차감됐다는 문자입니다. 잔액을 확인하니 6만 원입니다. 당장 3월 4일에 인천으로 이사를 하는데, 부지런히 카드를 긁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매장을 나와 집으로 가는 산책로로 향합니다. 직선으로 길게 뻗은 산책로를 걷는데 저기 멀리서 한 남자가 낡은 리어카를 끌고 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옵니다. 옆 동네에 갈 때마다 마주쳤던 폐지 줍는 남자입니다. 하도 많이 마주치니 언젠가부터 그를 보면 그의 얼굴과 옷차림, 리어카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관찰하게 됐습니다. 그는 50대처럼 보입니다. 그는 남색 경량 패딩과 검은 점퍼를 번갈아 입고 하의는 언제나 같은 청바지입니다. 그는 주로 리어카에 폐지를 담는데 가끔 확성기같이 폐지가 아닌 것도 담습니다. 어라, 오늘도 폐지가 아닙니다. 엄청나게 큰 침대 매트리스입니다. 리어카보다 훨씬 더 커서 안에 담지 못하고 위에 얹어놨습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계속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저 남자도 혹시 자주 마주치는 나를 관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칩니다. 그가 제 옆을 지나갑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와 교차할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뭔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건 아마 안부 인사나 생존 신고였을 거로 추측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말을 섞을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속으로는 많은 대화가 오갈 겁니다. 다음번에 봤을 때는 그의 리어카가 폐지들로 빈틈없이 꽉 찬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새 아파트 공동 현관 앞입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 저를 보니 잊고 있었던 저의 처지를 인식하게 됩니다. 기분을 환기할 겸 글 소재를 찾고자 산책하러 나갔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밖을 나가기 전, 안 좋았던 기분이 고개를 내밉니다. 이전보다 더 우울해졌습니다. 산책해서 나아진 것도, 얻은 것도 없습니다. 손을 씻고 노트북 앞에 앉습니다. 속이 타는 제 맘도 모르고 방 안은 너무도 고요합니다. 한참을 고요 속에서 가만히 있다가 작은 다짐을 합니다. 당신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자고요.


미안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고로 이야기꾼이 되어야 하는데,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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