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자랑

by 김퍼피

다들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장기(長技)가 있을 겁니다.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이런 식의 장기 말고 좀 재미난 거 있잖아요. 예컨대 알약 여러 개 한꺼번에 먹기, 사과 껍질 안 끊기게 깎기, 멀리서 던진 과자 받아먹기, 친구나 교수님 성대모사 등등. 저에게도 뽐낼 수 있는 장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소한 것을 특별하게 바라보기'입니다. 주로 사물보다 상황을 특별하게 바라봅니다. 이 장기는 노력해서 얻어졌다기보다는 선천적인 것 같습니다. 이 장기는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이렇게 설명하니 장기라기보단 어떤 비범한 능력 같네요.


평범한 상황을 특별하게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상황 속에 포함돼있는 모든 풍경이 바다의 윤슬처럼 반짝반짝하게 보입니다. 그와 동시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귀여움'입니다. 간혹 귀여운 감정이 지나치면 마음이 울컥하며 눈물이 왈칵 차오르기도 하는데 이 현상의 원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수성이 풍부해서 그런 거라는 이유로 치부해버리긴 싫습니다. 뭔가 더 과학적인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귀여운 것을 보면 폭력성이 발현되는 심리 현상의 학계 용어 '귀여운 공격성(Cute Aggression)'이 있듯이, '귀여운 울컥거림'도 있을 겁니다. 아직 연구되지 않은 미지의 분야인 거죠. 눈물까지 맺히게 하는 저의 장기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발휘되는지 궁금하실 것 같아 두 개의 에피소드를 준비해보았습니다.






1. 카페인이 체내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두뇌 회전이 되는 저는 커피 한 잔을 포장해오기 위해 집 밖을 나섰습니다. 단골 카페가 바로 코앞이라 슬리퍼를 신고 터덜터덜 걸어갔죠. 카페 앞에는 소박한 야외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도통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예외였습니다. 민트색 헬멧을 쓴 배민 라이더 두 분이 앉아있었지요. 두 명이 원형 테이블에 앉을 땐 보통 마주 보고 앉지만, 그분들은 같은 곳을 보며 나란히 앉아 있더군요. 자세히 보니 똑같은 포즈를 한 채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라이더가 무언가에 쫒기듯 전속력으로 오토바이를 모는 모습, 무뚝뚝하게 배달음식을 건네고 휙 사라지는 모습만 봐왔는데, 지금 보고 있는 라이더 두 분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은 생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순간 저의 장기가 발휘됐습니다. 그 장면을 특별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라이더 두 분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하면서 기분 좋은 음악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민트색 헬멧은 이 영화를 한층 더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싱그럽고 귀여운 영화를 오랫동안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다고 우뚝 멈춰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수상한 사람이 돼버리니 그분들 옆을 주저 없이 지나쳐 카페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사장님은 저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오늘은 손님이 별로 없어서 심심하네요." 심심하다니요. 사장님. 창밖에 아주 귀엽고 재미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고요. 저는 속으로 목놓아 외쳤습니다.



2. 에세이를 종이로 출력하여 사람들에게 매주 우편으로 보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즉 일주일마다 출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집에는 인쇄기가 없기에 출력소를 갑니다. 동네에서 좀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작은 출력소가 하나 있는데, 저는 그곳을 총 열 번 방문했습니다. 초반에 문의 전화는 다섯 번쯤 했을 겁니다. 전화를 했을 때 출력소 사장님은 항상 무뚝뚝하고 건성건성 대답했습니다. "감사합니.."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고요. 직접 방문하면 사장님의 무뚝뚝함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출력소에 처음 방문한 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히 서 있었습니다. 사장님은 그런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일이 분 뒤에 "뭐할 거요." 하며 제가 아닌 다른 곳을 보며 물었습니다. 저는 사장님에게 "흑백 출력해 주세요." "A5 사이즈요." "단면으로 출력해주세요." 요구사항을 줄줄이 말했습니다. 쉴 새 없이 쫑알거리는 저와 대조적으로 사장님은 어떠한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출력만 해주었습니다. 그 뒤로도 출력소에 갈때마다 저만 쫑알거리고 사장님은 대꾸도 안 하는 이 패턴은 항상 반복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근에 갔을 때 일입니다. 그날은 에세이가 아닌 다른 것을 출력하러 갔습니다. 꽤 많은 양을 출력해 스프링 제본을 했어야 해서 평소보다 오래 출력소에 머물게 됐지요. 사장님은 그날도 무뚝뚝하고 아무런 대꾸 없이 일만 척척 해나갔습니다. 저는 의자에 앉아서 발을 앞뒤로 왔다 갔다 구르며 제본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지루함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사장님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중국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전주가 끝난 후 1절이 시작되자, 정겹고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가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소리의 출처는 사장님이었습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말 없던 사장님이 노래를 부르다니. 그것도 중국노래를. 심지어 음색도 좋잖아! 속으로 꽤 큰 충격을 받은 저는 사장님은 넋 놓고 쳐다보았고, 순간 저의 장기가 발휘됐습니다. 커다란 출력기들 속에 파묻혀 작업에 열중하며 중국어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장님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사장님의 뭉툭한 손에 들린 꼬불꼬불한 스프링은 사장님을 사뭇 귀엽게 보이도록 해주었죠. 배경음악처럼 깔린 라디오 속 중국노래는 사장님을 더욱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장면을 멍하니 쳐다보던 저는 무언가 깨쳤습니다. 언제나 무미건조하여 무채색일 것 같았던 사장님의 삶이 사실은 다양한 색채로 뒤덮인 알록달록한 삶이라는 걸요. 그 깨침은 제 속에 있는 감동 버튼을 눌러 마음을 울컥거리게 했습니다. 이제 더는 사장님이 이전처럼 무심하게 보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무뚝뚝해 봐라. 난 이제 사장님이 뭘 하든 당신을 귀엽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돼버렸어요.






다 적지는 못했지만 이보다 더 평범하고 사소한 상황에 장기가 발휘되는 순간도 왕왕 있습니다. 저는 이 장기가 퍽 마음에 듭니다. 별다를 것 없는 대상이나 상황을 특별하게 바라보면 그날 제 하루는 덩달아 특별해지고 긍정적인 심상으로 가득해지기 떄문입니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 주로 일상의 사소함을 담아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감자로 저녁을 해결하는 가족의 모습입니다. 고흐는 지극히도 평범한 그 모습에서 가족들의 소박한 기쁨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캔버스에 유채로 그려내었죠.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본 사람들은 굉장한 혹평을 했지만, 고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그림을 변호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는 평범해서 볼 것도 없는 비루한 그림일지라도 고흐에게만큼은 특별했던 겁니다. 고흐의 장기도 저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저는 이 가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증거를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았습니다.



"매미가 서럽게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 고향에서 농부들이 화롯가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 것처럼 운치 있단다. 테오야. 이렇게 사소한 느낌들이 우리 인생을 밝혀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제가 고흐와 만난다면 우리의 장기에 관해 몇 시간이고 신나게 떠들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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