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맑음 Dec 28. 2020

어른이만 관람가능

15금과 35금 사이 어딘가, 우리들의 애니메이션


윌러비 가족 | Netflix 공식 사이트


윌러비 가족(The Willoughbys)

2020, 전체 관람가, 1시간 32분 (넷플릭스 오리지널)

주연 : 윌 포테이, 알레시아 카라, 마야 루돌프, 리키 저베이스, 마틴 쇼트, 제인 크러카우스키 목소리 더빙

장르 : 코미디





 이 영화는 2020년에 개봉한 작품답게 트렌드에 맞는 “힙함(Hip + 하다의 명사형)”이 있다.


 Hip Point No.1

 엔딩크레딧에서는 흔히 말하는 ‘가족’이 잘 표현되지만, 순식간에 지나간다. 입양신청서,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사진, 성적표, 문자 냉장고에 붙은 낙서같은 그림 등이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 나타나는 장면들과 ‘가족’다움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일시 정지를 하지 않으면 자세히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다. 고양이가 계속해서 일반적인 전개를 구닥다리 얘기라고 표현했듯, 형식적인 ‘이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됐어요’, 하는 엔딩은 굳이 중요하지 않아 빠르게 처리한 것일 수도 있겠다.      

 Hip Point No.2

 두 번째로는 캔디크러x 시리즈의 게임들처럼 사탕이나 소품들의 색감이 참 잘 표현되어있다. 플러스 요인으로 소품 하나하나의 질감이 섬세하게 잘 나타난다. 머리카락이나 콧수염으로 표현되어 주로 나오는 실들은 실오라기 하나까지 세밀하게 나타나 눈이 즐겁다. 접힌 종이들이나, 물감 지나가는 자리 표현들의 질감을 보면서 귀여움과 오밀조밀함에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덤이다.      

 Hip Point No.3

 마지막 포인트는 제인이 부르는 노래가 참 좋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는 배경음악뿐만 아니라 주제곡 또한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가 됐다. 반복되는 훅과 희망적인 가사로 계속 나오는 노래인 'I choose'는 마치 겨울왕국의 ‘Let it go’처럼 영화가 끝나고 흥얼거리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 한국어 더빙판에는 겨울왕국의 안나 역할을 맡았던 박지윤 성우님이 맡았다고 한다. I choose는 Alessi Cara가 불렀다. 집중하게 만드는 배경 음악들도 색깔들과 잘 어우러져 마치 뮤지컬을 연상시킨다. 음악들이 심각한 상황도 웃으며 볼 수 있게 만든다.    


"가족이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나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서로 사랑하며 모두 행복하게 잘살게 되는 이야기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여러분 취향이 아니랍니다."     


 이야기의 해설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대사다. 가족 이야기를 할 것을 암시한다. 행복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된 줄거리를 전반적으로 서술한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고 나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해 드린다.           




"가족이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좋아하시나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서로 사랑하며 모두 행복하게 잘살게 되는 이야기요. 그렇다면 이 영화는 여러분 취향이 아니랍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다. “창문을 많이 보면서 산” 고양이는 수 많은 가족을 봐 왔음을 장담한다. 고양이는 “현대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표현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는 가장 '현대답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나레이션을 맡아 하며 적절한 개입을 한다. 더욱 몰입할 수 있게 이야기의 흐름을 적절하게 이어주고, 필요 없는 긴장감이나 추측은 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와준다. 파란 고양이가 출연하기에 고양이의 나레이션은 파란색으로 써나가겠다.     


"팀의 부모는 사랑이 넘쳤지만, 팀에게 줄 건 없었어요."     

 아이들의 부모는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족이란, 자신의 남편과 아내뿐이다. 엄마는 늘 뜨개질을 하고, 가끔 엄마가 쓰다듬어 주면 아빠는 재롱을 피우거나 강아지, 고양이의 소리를 낸다. 아이들은 배가 고파 음식을 달라고 하지만, 늘 귀찮고 짜증이 나는 존재인 아이들에게 화만 낸다. 부모님이 화내지 않도록 오빠인 ‘팀’이 항상 욕받이가 된다.     


“항상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했지, 가족처럼”     

 영화에서는 장남인 ‘팀’, 여동생인 ‘제인’, 막내 쌍둥이들인 ‘바나비’들이 나온다. 영화의 제목이자 이 아이들과 부모가 속한 가문의 이름은 ‘윌러비’다. 팀은 태어날 때부터 들었던 위대한 윌러비 가문의 명성을 최고가치로 생각한다. 윌러비 가문의 사람들은 여자까지 콧수염이 나 있는데, 나도 저런 콧수염이 생기고 위대한 윌러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를 늘 추구한다. 여동생인 ‘제인’은 음악을 사랑한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조금이라도 흥얼거리면 엄마와 아빠가 끔찍하다며 소리를 지른다. 엄마가 뜨개질할 수 없으니 조용히 하라고 한다. 제인은 늘 ‘이러면 어때?’를 달고 산다. 전형적인, 아이의 호기심 많은 모습이다. 아이들이 공통으로 원하는 것은 그저 ‘식사’이다.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거나 시끄럽게 해서 부모가 화나게 되면, 맏인 ‘팀’은 석탄 창고에 갇힌다.      

 이 장면들은 아주 빠르게 휙휙 지나간다. 부모와 아이들의 소개, 처벌을 마치 밥 먹이는 것처럼 보여주는 간단함.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큰 충격을 안아줄 수 있다. 어떻게 아이들에게 밥을 안 줄 수가 있지? 어떻게 말을 안 들었다고 석탄 창고에 가둬 둘 수가 있어? 아동학대 아냐? 별별 생각이 다 들 여유도 없이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사실 세상에는 석탄 창고에 가두는 것보다 더 큰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벌’이라는 합리화로 폭력과 학대를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놀랍지도 않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아이들 앞에 상자에 버려진 고아가 나타난다. 고아를 키우자고 하는 제인에게 팀은 윌러비 가문도 아닌, 윌러비 저택에 살지도 않는 아이를 어떻게 데리고 있냐고 하고, 제인은 “얘를 안 도와주면 우리 부모만큼 나쁜 거”라고 하며 데리고 살자고 한다. 집으로 들였다가 결국 부모한테 들켜 엄청나게 혼난 아이들은 고아의 집을 찾아주기 위해 아이들은 바깥세상으로 향한다.           


“난생처음 집을 떠나는 건 힘든 일이긴 해요.”     

 아이들이 고아를 버리기 위해 집 밖을 나선다. 그럼 이제 아이들이 집 밖을 나가면서 겪는 고난과 역경들이 표현되는 걸까?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 정신없는 도시 속이지만 겁에 질린 팀을 제외하고는 바나비들은 알아서 길을 건너고, 누나를 졸졸 따라간다. 신나는 음악이 나온다. 마치 뮤지컬처럼 표현된다. 음악에 맞춰 빠르게 걷고, 걷는다. 처음 밖을 나가는 아이들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고아를 안고 앞장서는 제인을 따라 하늘에 펼쳐진 무지개 끝을 향해 다가간다. 무지개는 보통 희망을 주는 존재로 많이 표현된다. 하지만,      


“보통 구닥다리 이야기에서는 무지개 끝에 보물이 있잖아요? 여기선 아니에요.”     

 무지개 끝에는 ‘무단침입금지’라고 적힌 공장이 있다. 아이들은 고아에게 ‘루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처음처럼 박스에 담아 공장 앞에 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집이 생긴 루스를 부러워한다. 집이 생긴다면, 우린 어떨까? 음식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석탄 창고에 갇혀 있을 일도 없겠지. 책에서 본 것처럼 가족끼리 식사를 할 수 있을 거야. 제인의 ‘이러면 어때?’의 제안으로, 아이들은 스스로 고아가 되기로 한다. 바로 부모를 버리는 것.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를 버릴 수 있을까? 아이들은 여행사를 이용한다. 신난 아이들은 가짜 여행사 홍보 책자를 만든다. 고아로 만들어줄 치명적이고 로맨틱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스웨스에 있는 절대 못 올라 알프산.’ 한 번 올라간 이들은, 다신 내려올 수 없는 곳이다.     


 몰입해서 보던 우리는 '와. 얘들이 미쳤네.' 하고 생각한다. 그때 고양이가 말을 건넨다.


“이 이야기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인간들, 진정해요. 너무 예민하게 그러지들 말아요. ‘오, 이건 나빠.’ 자연의 섭리에요. 잘 될 겁니다. 봐요. 애들은 변화를 원했어요. 경고했잖아요, 이건 훈훈한 얘기가 아니라고요.”     

 그래. 뭐, 부모가 아이들을 먼저 방치했는데, 아이들도 왜 부모를 못 버려. 아니, 그래도 좀 심하지 않나. 혹시 내가 서양 사람들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이 영화는 현대판 고려장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나도 나이를 먹을수록 동생들의 ‘힙함’에 거부감이 들 듯 ‘어떻게 이런 걸 영화, 그것도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가 있지’, 하고 꼰대처럼 생각하게 된 걸까. 앞으로 어떻게 전개하려고 그러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다가도 일단 고양이가 안심시켜줬으니 따라가 보기로 한다.


 계획에 넘어간 부모들은 내버려 둘 수 없는 아이들을 돌봐 줄 값싼 보모를 고용하고, 보모인 ‘린다’가 집으로 온다. 린다는 아이들을 돌봐주며 음식을 먹여 아이들의 환심을 사고, 제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친해지지만, 팀은 여전히 보모를 경계한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고아를 버린 이야기를 듣고 보모는 기함하며 함께 고아를 찾으러 간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함께 갔지만, 보모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아인 루스는 무지개 끝의 사탕 공장에 있었다. 사탕 공장장인 멜라노프 사령관은 아이들에게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루스를 데려다줘 정말 고맙다고, 이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좋아졌다며 루스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한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보모는, 고아 보호국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아 보호국에 가게 되면 강아지처럼 우리에 갇혀 지낸다고 하며 놀란다. 이때 관객들은 고아 보호국이 나쁜 곳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윌러비 아이들에게 고아 보호국이 위험한 곳일지, 사는 공간이 더 위험한 곳일지는 모르겠다. 보모는 멜라노프 사령관에게 사탕만 먹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의 무궁무진한 미래에 대해 알려준다. 대학에도 가야 하고, 의사가 될지도 모르며 차세대 ‘모비 딕’이나 ‘모나리자’ 같은 작품을 탄생시킬지도 모르고, 비행기로 달에 갈지도 모르며,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값싼’ 보모라고 표현됐음에도 불구하고 보모는 마치 ‘금쪽같은 내새끼’의 오은영 박사님 같은 역할을 한다. 아이들에게 가족이 뭔지, 무엇이 학대인지를 알려주고 혼자 살아온 멜라노프 사령관에게 아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설명해준다. 윌러비들은 가만히 대화를 들으며 멜라노프 사령관, 보모, 고아였던 루스를 바라본다. 표정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는데도 마치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타깝게도 윌러비 아이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죠. 그들의 부모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요.”     

 부모는 여행 중 돈이 다 떨어지자 집을 팔아버리고, 보모에게 아이들 처리는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아이들은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해 집안 곳곳에 함정과 괴물을 설치해 사람들을 쫓아낸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신나는 음악들을 통해 마치 코믹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윌러비 가족은 용감하게 집을 지켰지만, 못 당하는 게 있었죠.”

 승리의 기쁨도 잠시, 아이들이 상대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난다. 바로 ‘완벽한 가족.’ 사랑으로 가득한 그들을 어떠한 함정과 괴물도 쫓아낼 수 없다. 아이들은 당황하지만, 위층으로 손을 잡고 올라간 ‘완벽한 가족’에게 뭔가가 겁을 주어 쫓아낸다. 아이들은 얼른 위로 가본다. 그곳에는 괴물로 분장한 보모가 있었다. 보모의 도움으로 아이들은 집에 남을 수 있게 된다.      


 왜 '완벽한 가족'을 아이들에게 큰 고난으로, 시련으로 표현했을까? 우리는 세상에 완벽한 가족은 없다는 것도 알고 완벽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알면서도 가끔 이런 고난을 마주할 때가 있으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박탈감을 느낄 때가 살면서 분명히 있으니까. 이런 것들을 아이들이 벌써 알 필요가 있을까. 이런 감정을 겪은 사람들만 보고 공감하면 될 것이다. 이로써 한 번 더 확신이 든다. 정말, 아이들이 볼 영화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 전날 팀이 한 실수가 있다. 보모와 부모가 같은 편이라 생각해서 고아 보호국에 연락했던 것이다. 아이들과 보모는 위기를 맞는다. 보모는 상처를 받는다.     


“아이들은 정말 잔인해질 수 있다니까. 어서 돌아가. 애들한테 더 상처받기 전에.”          

 어쩌면 악역이라고 생각되는, 무서운 배경음악과 함께 보라색 피부와 선글라스로 무장한 고아 보호국 사람들이 보모인 린다에게 한 말이다. 린다 또한 고아원에서 자랐고, 그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을 뿐인데. 배신감을 느끼지만, 화를 내지 않고 슬퍼한다. 그게 참 와닿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제인은 오빠인 팀에게 크게 화를 낸다. 그러나 싸울 시간도 없이, 고아 보호국 사람들은 ‘표준 유년기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며 아이들을 각각 떨어트려 놓는다. 공식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에게 집도 찾아주고, 학교에도 넣어주는 ‘표준 유년기 체험’은 아이들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이 불쌍한 아이들은 외롭게 흩어지고 길을 잃었죠. 저처럼요. 바나비들은 현대식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았죠. 인터넷이 어떤지, 아시잖아요. 제인의 집주인은 음악이 지닌 치유의 힘을 믿었지만…. 제인의 노래는 사라졌어요. ‘이러면 어때?’도 더는 하지 않았죠. 팀은 변화를 거부하고 선의를 품은 가정을 뛰쳐나왔죠. 옛날 윌러비 저택의 삶을 되찾고 싶어 했죠. 도시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때론 고양이로 때론 쥐로 살아야 하죠."

          

 원래 살던 집 또한 팔리게 된 팀은 결국 ‘너희 잘못은 우리가 고친다.’라고 적힌 고아 보호국에 갇히게 된다. 보모인 린다가 변장하고 팀을 구하러 오지만, 팀은 죄책감에 빠져 있게 내버려 두라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보모는 “신세 한탄 시간이니?”라고 물으며 팀 곁에 앉아 동생들은 네가 필요하고, 너 또한 동생들이 필요하다고 용기를 준다.      


 팀이 고아 보호국 방 안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밥도 먹지 않은 채 쪼그려 있는 모습은 참 어디서 자주 본 장면이다. 우리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팀이 하고 있다. 가족을 잃고, 갈 곳을 잃은 팀이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자세다. ‘신세 한탄 시간’이라는 표현으로 가볍게 넘어가지만 우리는 이 가벼운 표현에 비해 참 오래 겪는다. 겪을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도 겪는 중인 사람도 있고, 평생 겪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나에게도 린다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혹은 앞으로 나타나 나를 구해준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우리는 팀에게 녹아든다.

   

 팀은 린다와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고아가 되어있는 아이들. 현실은 아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갈 곳도 없고 부모도 없으니 보호국 사람들은 계속해서 아이들을 따라온다. 팀은 부모를 찾아오자고 한다. 보모는 기겁하며 나쁜 부모들이잖아, 하고 외치지만 팀은 “하지만 우리한텐 그 사람들뿐”이라며 ‘생물학적 부모’를 찾아와야 한다고 한다.          


"우린 스스로 고아가 됐으니까 고아가 안 되는 것도 스스로 해야지."

아이들은 멜라노프 사령관과 함께 만든 사탕 비행선을 타고 보모와 사령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부모님을 찾으러 간다. 부모는 산속에 얼어 있다. 아이들은 두 분을 구조하러 왔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우리가 부모를 여행을 보낸 것이다, 고아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요. 우리는 아주 잘못 생각했다며 용서를 구한다.    

 

“우리가 완벽한 가족은 아니잖아요. 알프산 내려가는 거 도와드릴 테니까 모두 같이 살게만 해주세요. 사랑 안 해주셔도 돼요. 다시 부모님이 돼 주실래요? 제발요.”          

 팀의 간절한 말과 아이들의 눈빛에 부모의 표정이 바뀐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거 같다며, 우린 더 잘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사랑을 위해서. 부모의 캐릭터 뒤에서 후광이 빛난다. 아이들은 안심하고 기대에 찬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랑’엔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이들을 비키라고 하며 버리고, 아이들이 만든 비행선을 들고 달아난다. 아이들은 부모의 뻔뻔함에 황당해하고, 이제 정말 갈 곳이 없어진다. 추위가 아이들을 점점 덮어오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인의 노래를 끝으로 눈 내리는 산에서 다 함께 꼭 껴안은 채 얼어버린다.     


"윌러비 아이들의 굳은 의지와 상상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는 건가요? 세상이 이렇게 냉정할 수 있다니. 하지만 잊지 마세요. 이 이야기는 구닥다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끝낼 순 없겠죠?"

아름다운 제인의 노랫소리를 들은 루스가 제인이 있는 곳을 알아내 보모, 멜라노프 사령관과 함께 찾으러 온다. 정말 고아가 된 아이들을, 제인의 마지막 '이러면 어때?'로 가족이 되자는 제안을 한다.  보모와 멜라노프 사령관이 아이들을 가족으로 맞으며 이야기는 끝난다.     


"네, 좀 이상하긴 하죠. 그렇지만 우린 결국 해냈어요. 굳은 의지, 상상력, 희망으로요. 전 보기만 하면 좋은 이야긴지 안다니까요. 최고의 이야기는, 가장 힘든 이야기니까요. 보세요, 완벽하게, 안 완벽한 가족이죠. 원했던 걸 다 갖진 못했지만, 필요한 건 다 얻었죠."


  

 첫째이자, 오빠이자, 어린아이인 팀은 한국에서 흔히 표현되는 '가장'이다. 그러나 제일 답답한 ‘고구마 답답이’ 같은 역할이다. 보모를 경계하고 위기로 굴러들어가 관중들을 애태운다. 바보야, 제인 말을 들어야지. 저 보모는 착한 사람이야, 그렇게 밀어내지 마. 아, 신고하면 어떡해, 너희를 구해 줄 유일한 사람인데. 너네를 도와줄 어른들과 함께 알프산을 가야지, 버리고 도망가면 네가 더 힘들잖아. 어휴, 저 바보.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가 사람에게 곁을 내주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처럼 보모에게 풍선껌을 주며 애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지켜야 할 동생들이 있다. 윌러비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 그렇기에 팀은 늘 긴장되어있다. 답답한 팀이 정말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겪었던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면 더 꼬인 길로 갈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더 잘됐으면 싶고, 쉬운 길로 가길 원한다. 바보같이 보이고 답답해 보이는 팀에게 우리는 어느새 정이 들었나 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악역을 찾았다. 처음에는 저 보모가 ‘값싼’ 보모라고 표현되니 악역인가 보다, 했다가 보기 좋게 추측이 비켜나갔다. 무섭게 표현되는 고아 보호국의 직원들이 악역인가 보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린다를 걱정해주고 린다가 주도권을 쥐는 것을 보며 내심 기뻐한다. 나중에는 아, 결국 부모가 악역인가보다 했는데 마땅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나는 왜 악역에 집착했을까? 애니메이션 속에서 굳이 악역이 있고 고난이 있어야 주인공이 더 빛이 날까? 그들은 그저 우리처럼 주어진 상황을 어찌 되든 살아내고 자라날 뿐인데, 내가 너무 많은 의미와 이유를 찾으려 들려 하나 싶다. 어쩌면 나도 고양이의 말처럼 구닥다리 이야기에, 보통의 생활에 너무 많이 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는 게 힘든 사람들에겐 악역이라도 있어야지 덜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구실을 만들 수 있는 게 좀 더 납득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검색하면 평점이 좋지 않다. 아마 내가 초반에 느끼는 불편한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작품에서 불륜은 로맨스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지만 비난하면 ‘그냥 드라만데, 영환데, 예술작품인데,’ 하며 ‘진지충’이나 ‘꼰대’ 취급을 받는다. 부모를 버리는 것은 그저 풍자로 넘어가기 힘들지 않을까 싶고, 뭐 아직은 ‘우리나라 정서상’ 맞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언제까지 불편하다고 못 본 척할 수 있을까? 높은 시청률을 찍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또한 주인공 동백이는 고아다. 동백이를 찾아온 엄마에게 딸은 똑같이 엄마를 버린다. 우리는 그걸 보며 오히려 동백이에게 이입하고 함께 슬퍼한다. 내용은 같은 전개인데 왜 거부감이 드는 것일까? 동백이의 힘들었던 세월과 서사를 알아서일까, 아니면 힘든 내용을 애니메이션으로 너무 가볍게 표현해서일까.


 영화 초반에는 나 또한 그랬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인데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겠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애니메이션이라서 다행이고, 애니메이션이라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더 생생하기에 잔인하고, 리얼하게 표현하면 아픔이 있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를 15금과 35금 사이 어딘가로 나이 제한을 두고 싶다. 중이병이라 부르지만, 나에 대해 가장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대와 우리 또래 어딘가에 속한 사람에게 추천하기 좋은 영화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하다면 당신은 꼰대 에요, 라고 말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그러나 우리는 꼭 내 일이 아니더라도 주변 어딘가에서 보고 듣고 겪는다. 윌러비보다 더한 환경에 처해 도의적으로 부모를 ‘버림’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그런 고민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고, 그런 것을 고민하는 당신이 나약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들이 빠르게 변하는 세대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요새 트렌드에 맞게 이보다 잘 표현한 애니메이션은 없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고에도 닿지않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