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지문들 #11 감기

by 김표고


<김추추의 이야기>



감기: 감기에 대한 4가지 생각

1
새해가 되면 뉴스는 언제나 시민들의 소원을 비춘다. 그저 우리 가족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처럼 평범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뭐가 이렇게 소박하지? 때로 내 소원은 거의 빌게이츠 급일 때가 많은데. 그러나 아들이 독감에 걸린 후 나 역시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빌었다. 건강은 소박한 게 아니라 최상의 것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서, 일상의 감사보다는 이 나이 먹도록 여전히 갖지 못한 것들에 손을 뻗고 있었는데, 감기는 그 허황된 멘탈을 제자리로 돌려주는 맴매 같은 것이더라.

2
원래 나는 감기에 잘 안 걸렸다. 나쁜 연애 중일 때는, 이를 테면 상대가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불공평한 연애 중일 때는, 부러 콜록거리며 동정심을 유발하고자 애쓴 적도 있다. 가짜 증상을 미끼로 걱정을 사려고 했던, 못난 연애의 화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엄마가 된 후 나는 감기를 두려워하게 됐다. 출산 이듬해에 감기에 걸렸는데 감기약에 취한 상태로 혼자 육아를 하다가 손이 미끄러지면서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내 몸이 성한 것이야말로 애미 제1의 본분이구나 그때 느꼈다. 그 뒤로 감기약을 절대 먹지 않는다. 우리의 엄마들이 제발 약 좀 챙겨 드시라 해도 그렇게 약을 안 먹는 건 우리들을 키울 때 길들여진 버릇이 아닌가 싶다.

3
올해 겨울은 다소 혹독하다. 늦가을에 어린이집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피로가 점점 쌓였다. 어린이집까지 가는 길은 춥고 나날이 미세먼지도 심했다. 미팅하러 격식 있는 자리에 가게 되는 날이면 이너는 커리어우먼처럼, 아우터는 등산객처럼 입어야 했다. 미팅은 언제나 월요일에 생겼다. 내 노트북과 노트와 레퍼런스로 보여줄 책자 등등까지 챙겨야 할 아이템이 수두룩인데 애 낮잠 이불세트도 들고 가느라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차를 끌자니 강남까지는 전철이 편하니까. 대중교통사의 대명언이 있지 않은가. ‘지하철은 지켜준다 약속시간 어김없이’(이거 기억하는 분이 계실런지!)
결국 나는 겨울을 잘 견디기 위해 친정으로 갔다. 휴가 기분으로 친정에 도착한 날, 아이에게 열이 났다. 미열이겠거니 했던 열은 38.5도로, 감기겠거니 했던 열은 39.5도로 넘어갔다. 친정은 강원도 산골이다. 눈이 온다면 꼼짝할 수 없다. 다행히 눈은 비로 변해 쌓이지 않았다. 119에 전화해 상태를 말했다. 소방서가 가까우므로 직접 상태를 보고 판단해주겠다는 답이 왔다. 불덩이 같은 아이에게 옷을 입히는 사이 구급대원이 도착했다. 대원은 이불에 묻은 코피 자국을 한 번 보고, 아이 열을 한 번 재보더니 바로 병원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매우 작지만 동네에서는 유일한 종합병원에 도착하자 응급실은 북작북작했다. 연말연시에는 왜 그리 아픈 사람이 많은가. 기침을 쉴 새 없이하는 노인들 틈에서 내 아이는 최연소 환자였다. 아이의 혈관을 찾기 위해 손발을 톡톡톡 두드리던 의료진의 미안한 표정은 응급실에서 내가 처음 본 유형의 것이다. 갑자기, 그렇게 누워있는 아이를 보자 왈칵 울음이 터졌다. 집 근처라면 좀 나았을까?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동네에 이름도 모르는 병원 응급실 침대에 홀로 누워있는 내 아들. 마스크를 쓰고 링거를 꽂고 있는 내 아들을 여기 눕게 만든 건 독감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검사했을 땐 음성이었는데.
나는 그때부터 어디서 누구를 만난 게 잘못이었나를 되짚다가 결국 다 내 잘못이다로 결론 내렸다. 한겨울에도 활동해야 건강해진다며 등하원할 때 손잡고 뛰자고 했던 것, 층간소음이 신경 쓰여 늦게까지 밖에서 놀자고 한 것, 휴대폰 만지고 손을 안 씻고 아이에게 물을 먹인 것, 마스크를 매일 씌우지 않은 것, 과일 많이 먹으면 된다고 다른 애들이 다 먹는다는 비타민 홍삼 등등을 먹이지 않은 것…. 또 뭐가 있을까. 찾으려면 내 과오는 끝도 없을 것이다.
눈물을 닦으려 응급실 밖으로 나갔더니 돌도 안 돼 보이는 아기들이 여기저기서 울고 있더라. 잠시 후 내 아들의 옆 침대는 쪽쪽이를 물고 온 11개월짜리 아이의 차지가 됐다. 그 아기도 혈관에 바늘을 꽂았다. 아이의 엄마는 울지 않았다. 나는 또 한 번 나약한 자신을 반성했다. 애가 아프니 그저 반성과 간절한 기도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다.
이 모든, 감염과 치유의 과정이 인간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안심이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더 가혹해져서 미세먼지가 심해지고 바이러스가 강해져서 아이들이 이전보다 더 아프게 된 거라면, 신에게 빌고 싶다. 적어도 아이들만은 아프지 않게 지켜주길 빈다. 이럴 때 부모의 기도는 똑같다. ‘제가 대신 아플게요. 나쁜 건 다 저한테 주세요.’ 그러나 정작 자신마저 아파서 간호하지 못하게 되면 기도 내용이 바뀐다. ‘적어도 애가 괜찮아질 때까지 저라도 멀쩡하게 해주세요.’

4
이제 나에게 감기란 최선을 다해 피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의 안위가 내 건강에 달렸다는 사실도 실감한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부모님들,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잡시다. 건강합시다!



글 : 김추추(writer0511@gmail.com)




<김표고의 이야기>




















글, 그림 : 김표고 (인스타그램 : @kimpyogo / 메일 : kimpyogo@naver.com)



<프로젝트 소개>

자주 떠오르는, 매주 한 단어
일상의 지문들
김표고 X 김추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 대답이 될 만한 단어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참 평범한 것 같은 일상인데 이 단어를 적다 보니 각자의 일상은 꼭 그 사람만의 지문이 되었습니다. 떠올려보세요. 당신에게도 소중할, 이 아름다운 단어들을.

'기타 등등의 연애' 저자이자 매일 3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징그럽게 성실한) 김표고와, 매거진 에디터로 12년을 일하다가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글을 쓰(고 혼자 읽)는 김추추가 함께 만듭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일상의 지문들 #10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