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름은 이름일뿐.
위아영 씨는 마흔 셋 할머니다. 스무살 12월에 딸을 낳았고, 그 애가 자라 스무 살이 되자마자 프랑스 남자와 눈 맞아 '철저한 가족계획'을 세우더니 곧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절친이 선 보러 다니는 만 서른 아홉에 할머니가 됐다.
위아영 씨는 수능 보는 날까지 공부만 했지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순둥이 소녀였다. 수학 과외해주던 오빠 친구가 이제 성인 됐으니 술 가르쳐 준다고 해서 놀러갔다가 술에 취했다. 그때 친오빠는 군대에 있었다. 원래 생리가 불규칙했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뭔 지 몰랐다. 그러나 4개월 후, 오빠 친구가 군대에 간 후에야 아영 씨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게 됐다. 양쪽 집에서 어른들끼리 없던 일로 정리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커다란 두려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꼈고, 눈에 뭐가 씌인 듯 그 길로 도망쳤다. 배가 불러올수록 너무너무 무섭고 힘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애를 낳기로 선택한 순간 가난해졌다. 시설을 전전했지만 엄마가 아영 씨 명의로 사 놓은 창원 아파트 때문에 한겨울에 미혼모 시설에서도 쫓겨났다.
아영 씨는 극도의 불안과 공황장애를 앓았고 그러는 사이 아기는 홀로 누워 견뎠다. 때문에 딸 세희는 네 살이 될 때까지 발달장애를 앓았다. 정신 차리고 집 근처 양말 편직 공장에서 닥치는 대로 양말을 뒤집어 돈을 벌었다. 돌쟁이 세희를 등에 업고 할머니들과 함께 양말을 뒤집으며 하루 2만 8천 원을 벌었고, 그 할머니들에게 애를 맡기고 오후에는 식당 알바를 했다. 식당에서 애 이유식을 몰래 만들고 잔반을 싸와 끼니를 해결했다. 그리고 10년 후, 마침 공장 주인이 재개발 때문에 빨리 팔고 이사 가겠다고 하자 아영 씨는 덜컥 웃돈 주고 공장을 사겠다고 했다. 아영 씨는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손을 벌렸다. 엄마는 창원 아파트를 판 돈의 절반을 주고 완전히 연을 끊었다. 그렇게 하루 한 끼로 버티며 탈탈 모은 돈으로 딸이 원하는 건 뭐든 도왔다. 열일곱에 프랑스에 요리 배우로 가겠다고 했을 때도, 프랑스 남자와 돌아와 갓 스물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을 때도. 사람 구실 못 할 것만 같던 느림보가 남보다 빨리 결혼한다니, 자기가 한 고생은 그세 잊고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다. 저라고 얼마나 한국 뜨고 싶었을지 아니까. 미혼모 딸이라는 딱지 안 붙는 데서 훨훨 날고 싶을 테니까. 세희는 3년만에 한국에, 그것도 한국 식당 사장님이 꿈이라는 프랑스 총각 엉트완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도 갖겠다고 선언했다. 북적북적 사는 게 꿈이었다는 말에 아영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영 씨는 그렇게 서른 아홉에 할머니가 됐다. 2년쯤 할머니 소리를 매일 들으니 이제는 거울을 볼 때 자신이 환갑 넘은 할머니로 보인다. 더불어 ‘내가 그걸 어떻게’가 입에 붙었다. 마음은 용암이지만 겉으로는 이 나이에 할머니 된 팔자를 받아들이려 애쓴다. 그러나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잃어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며 남몰래 동화를 그린다. 동화 속 소녀는 늘 사랑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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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 씨는 내가 최근 두 달 동안 열심히 쓰고 있는 단막극의 주인공이다. 황혼도 아닌데 황혼육아 중인 할머니가, 이렇다 할 연애 경험이 없는 쑥맥에 괴짜 만화가 태범 씨와 '첫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태범 씨는 순정만화 작가가 모태 솔로라는 비아냥에 시달릴까봐 유부남 행세를 한다.
누군가 뽑아줘야 이 작품에 세상에 나오겠지만, 나는 매일 4시간씩 이 두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대본을 썼다. 우리는 자주, 편의상 분류되는 명칭에 굴복된다. 그 틀 안에 들어가 삐져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지난 3년 간 내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애엄마가 무슨', '야 이제 너도 아줌마야', '우리가 나이가 몇인데' 같은 것이었다. 나는 스무 살 때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있는데 여전히 듣는 말은 '그 나이에 뭐하러', '어차피 늦었어'다. 그러나 나는 예순에 화가가 된 할머니, 여든에 작가가 된 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다.
글 : 김추추(writer0511@gmail.com)
글, 그림 : 김표고 (인스타그램 : @kimpyogo / 메일 : kimpyogo@naver.com)
<프로젝트 소개>
자주 떠오르는, 매주 한 단어
일상의 지문들
김표고 X 김추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 대답이 될 만한 단어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참 평범한 것 같은 일상인데 이 단어를 적다 보니 각자의 일상은 꼭 그 사람만의 지문이 되었습니다. 떠올려보세요. 당신에게도 소중할, 이 아름다운 단어들을.
'기타 등등의 연애' 저자이자 매일 3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징그럽게 성실한) 김표고와, 매거진 에디터로 12년을 일하다가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글을 쓰(고 혼자 읽)는 김추추가 함께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