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내가 지켜줄게.
새해가 되면 지난 해에 이루지 못한 목표를 점검하고 새해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는다. 성과에 관계없이 이 루틴을 지켜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음력 설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신년의 첫 달이 마음 같지 않게 흘러갔다면 역시 새해는 설날부터라고 위안할 수 있으니까. 남들은 어떻게 사나 싶어 주변에 숱하게 물어보니 절반 이상이 '무슨 계획? 그런 걸 왜 해?'라고 답하더라.
충격이었다. 나는 그런 것이 없으면 내비게이션 없이 초행길 가는 기분이 드는데 다들 어쩜 그리 길 잃지 않고 착착 잘 가는 거지. 게다가 몇은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너 그래서 뭐 나아졌어? 계획 못 지켰지? 거봐, 짜봐야 아무 소용 없다니까.' 그렇다. 나는 10년 전 계획을 아직까지 붙들고 있다. 내려놓지도 완료하지도 못한 채 질질 끌면서. 악기, 외국어, 운동, 금주 같은 건 5년째 붙박이다. 그렇게 누적된 미완결 목표와 새로운 목표가 더해져 너무 많은 계획들이 생겨 버렸다. 연초부터 마음이 급해지는 걸 보며 역시 계획이 없는 쪽이 더 자신감 있게 잘 사는 것 같다는 흔들림도 있었다.
대화 후에 사람들은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불안을 계획으로 다스리는 종족도 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나는 납작 엎드렸다. 한 번 엎드리면 등 위로 많은 게 쌓인다. 쪼그라든 김추추는 그래도 잘 살고 있다 항변하는 대신 '아아, 그래서 다들 그렇게 잘 사시는 거구나. 멋져요'라고 말했다.
결국 '어떻게 새해를 잘 보낼까'라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만남과 질문들이 '여태 멍청하게 살았구나. 그러니 내가 지금도 이 모양이지'라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 자존감이 격락했다. 슬펐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스스로를 바보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 굳이 나를 깎아내려 타인을 높인다는 것이. 그래서, 몇 차례의 신년회 후 나는 2020년 계획표 맨 윗줄에 계획이 아닌 '약속'을 하나 넣었다.
누구도,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나를 깎아내리지 않도록 지킬 것.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기란 참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로 나와 약속했다.
글 : 김추추(writer0511@gmail.com)
글, 그림 : 김표고 (인스타그램 : @kimpyogo / 메일 : kimpyogo@naver.com)
<프로젝트 소개>
자주 떠오르는, 매주 한 단어
일상의 지문들
김표고 X 김추추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 대답이 될 만한 단어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참 평범한 것 같은 일상인데 이 단어를 적다 보니 각자의 일상은 꼭 그 사람만의 지문이 되었습니다. 떠올려보세요. 당신에게도 소중할, 이 아름다운 단어들을.
'기타 등등의 연애' 저자이자 매일 3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징그럽게 성실한) 김표고와, 매거진 에디터로 12년을 일하다가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글을 쓰(고 혼자 읽)는 김추추가 함께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