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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Feb 15. 2018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이민경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면서, 끊임없이 어떻게 내가 페미니스트인지를 타인에게 설득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든 내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두 귀를 막고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꼴페미'니 '메갈'이니, 불러댔다. 이런 네이밍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결국 여성을 '성녀-악녀' 이분법으로 나누어 어떻게든 여성 군집의 세력화를 막으려 하던 수단이었다. 나 역시 페미니스트임을 스스로 몇 번 씩이나 검열하며 페미니스트라 자칭하는 이들 역시 검열하려 들었던 때가 있었다. 이런 것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학내의 여성주의 운동을 처음 배웠던 때가 아니었다.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던 순간이 아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나 스스로가 필요성을 느껴 주변의 뜻이 같은 동료들과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갔던 그 순간이었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주장하기 위해 타인을 설득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 후로는 스스로 페미니즘 서적을 많이 찾아서 읽으려 노력하며 나 자신을 갈고닦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그 물결을 타고 전국의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체성을 자각하며 거리로 쏟아졌다.


내 삶은, 탄생에서부터 그 궤를 페미니즘과 함께 한다. 여아 선별 낙태가 자연스럽게 여겨지던 1980년대~1990년대 사이에 나는 살아남았고, 초중고 교육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남성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30대에 접어들면서도 나는 언제나 안전을 내 인생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누군가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나는 밤늦은 시간에 귀가를 하면서 나의 옷매무새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나의 탓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혹시라도 벌어질 불미스러운 사건에 내 변명거리를 만들어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나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에는 뿌리가 없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예전에 봤던 경순 감독의 '레드 마리아'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 일본의 한 여성 노숙인 활동가가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그녀가 하는 행동이 페미니즘이라고 하여 도서관에 가서 페미니즘에 관련된 이야기를 죄다 찾아 읽었는데, 엉엉 울었다고. "그 책은 무려 20년 전에 나온 책이었는데, 그때에 주장하는 페미니즘 이슈와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아진 것이 없다." 그 사실에 절망하듯 엉엉 울었다고 말한 그녀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았다. 과연 이것은 여성의 운동이, 페미니즘이 뿌리가 없어서, 역사가 없어서였던 것 일까?


하지만 이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에서는 고의적으로 지워졌던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했다. 나도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 아니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저평가받았고 그래서 현재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호주제가 폐지된 게 2005년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고의적으로 축소되었던 호주제 폐지의 성과 기록을 13년이 지난 지금, 2018년에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호주제를 폐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어떻게 노력해왔는지를. 그리고 단순히 호주제가 호적의 주인을 남성으로만 한정해 놓은 성차별적인 법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단순히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자기결정권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는 법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페미니즘은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 솟아난 것이 아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억압받는 소수자가 있었고, 어디서나 그에 불응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며, 언제나 행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관은 이 모든 것을 축소하고 감추고 괄시했다. 그리하여 여성 스스로도 페미니즘의 계보는 없다고 여기게끔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호주제 폐지와 같은 것은 숱한 여성들의, 페미니스트들의 끊임없는 연대와 노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페미니즘 이슈가 떠오를 것이고 현실에 정착이 될 것이며 '상식'이 될 것이다.


나는 이 계보를 잇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거나 크지는 않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여성들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에 쪽 비녀를 모았던 부녀자들의 마음과 같이, 나도 페미니즘의 이슈를 위해서라면 쌈짓돈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페미니즘은 결코 외로운 이념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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