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rohabitat, 정말 아주 작은 공간의 위로
소공녀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나오기 전부터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얼추 알고 있었다. 브런치에서도 종종 메인에서 소공녀 홍보 글을 접하기도 했고, 어릴 적 스쳐 지나간 동화, 소공녀도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둘 모두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읽지 않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잔잔하게 남은 여운에 영화 소공녀의 평을 브런치에 검색해서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봤다.
아마 근래에 본 한국 영화 중에 가장 여운이 길게 남은 영화일 것이다. 모든 인물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이야기들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주인공 '미소(이솜 분)'라는 캐릭터도 두 번 보니까 좀 더 이해가 되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서울에 사는 미소는 집세가 오르자 집을 포기하고 친구들 집을 전전하게 된다. 대학 시절 밴드를 함께 했던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미소는 그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 가사도우미로 일당을 벌고 매일 단골 바에서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연신 담배를 피운다. 그의 유일한 안식이 되어준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남자 친구 한솔(안재홍 분). 그러나 담배값도 술값도 오르고, 한솔마저 그를 버리고 한국을 떠난다.
미소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이 없다. 극 중에 정확한 시점은 나오지 않지만 미소에게는 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안 계셨던 것 같다. 부모, 가정, 가족, 그리고 집이 주는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이 형성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월세가 오르자마자 집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고 담백한 결정처럼 보였다.
오히려, 2015년을 맞이하며 2천 원이나 올라버린 담뱃값을 마주했을 때, 가겟세가 올라 위스키 값을 올려야 한단 말을 전해 들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가 돈을 벌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야 한단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미소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에게 집은 없지만 이런 소중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것들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순히 보면 빈곤 여성의 이야기를 그의 시선으로 담담히 그려내는 영화다. 그는 비록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다고 말한다.
예전에 읽었던 빈곤을 다루는 기사에서, 우리 사회가 빈곤을 그려내는 모습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던 적이 있었다. 3천 원짜리 틴트를 선물 받아도 기뻐하는 아이에게 "그런 것 살 돈은 있냐"라고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는 '빈곤'의 모양마저도 규정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미소는 가난한 주제에 술이나 담배를 독하게 끊지 못하는 '염치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미소는 가난하다고 해서 취향마저 박탈당한 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소에게는 위스키와 담배가 그를 그로서 존재하게 해 주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미소 다움'을 간직한 채로 사람들을 만난다.
돈이 없어서 티브이에 나오는 맛집도 못 가고, 남들 하는 것들을 즐기지 못하게 해서 항상 미소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한솔에게, 미소는 '너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도 진심이었고, 미소는 한솔을 아끼는 마음에 단 한순간의 거짓이 없었다.
하지만 한솔은 달랐다. 미소에게 못해준 것들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내가 거지이기 때문에 너도 거지인 것이라고 말하며 미소를 향한 무모한 책임감만을 갖고 있었다. 미소는 단 한 번도 한솔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한솔은 미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보통 사람'이어서 죄책감을 내내 달고 있었던 것이다.
한솔의 착한 마음을 보여주는 신은 위의 스틸 컷이 나오던 장면인데, 미소가 집어던진 꼬치를 묵묵히 주워 봉투에 담는 모습이 어쩐지 인상에 남았다. 미소는 그런 다정하고 섬세한 한솔을 좋아했던 것이지, 무엇이든지 대신 책임져주려는 모습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소를 향한 책임감 역시 한솔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미소는 그런 한솔이 결국 미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미소는 집이 있는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간다. 그렇지만 그들 중 누구도 미소가 원하는 '집'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그들에게 집은 잠만 겨우 자는 곳, 시집살이에 치이는 곳, 감옥, 부모님에게 메인 곳, 그리고 고난이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포도당 주사까지 맞으며 사는 친구 문영(강진아 분)은, 자신이 너무 '예민하다'며 미소를 재워줄 수 없다고 말한다. 흔쾌히 미소를 집에 재워준 현정(김국희 분)은 고된 시집살이에 본인의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며 치여 살고 있었다. 어렵게 구한 아파트에서 신혼을 누려야 할 대용(이성욱 분)은 월급의 절반 이상을 아파트 대출금으로 갚으며 벗어나지도 못한 채 갇혀 있었고, 미소에게 "결혼하자"던 록이(최덕문 분) 역시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가기보다는 부모님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집에 메여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넓고 방이 많은 집이어도, 남이 오래도록 머물면 불편하다며 토로하던 정미(김재화 분)에게도 집은 결국 고난이었다. 그 자신의 삶이 없고 남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가진 것들에 집착하는 모습이 너무도 사실적으로 보였다.
집 없이 떠도는 미소에게 단 한 번도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 닥친 가장 폭력적인 상황은, 정미가 내뱉던 폭언들이었을 것이다.
실제 여성 노숙인들이 숱한 성폭력 상황에 놓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미소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환상 같았다. 영화에서마저 그런 지독한 것들을 보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과, 꼭 그런 '지독한' 일들을 겪어야만 사람이 변화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에서 잘 보여주었다.
극 중에서 미소가 가사도우미를 하던 집 중에는, '성노동자'로 암시되는 여성, 민지(조수향 분)의 집도 있었다. 깔끔한 오피스텔, 그렇지만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던 공간에 민지와 미소가 마주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민지는 아빠를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했고, 미소는 민지에게 "밥은 먹었어요?"하고 묻는다.
미소는 민지의 상황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민지의 상황을 결코 자신의 기준이나 잣대로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담담히 자신의 할 일을 하며 섣부른 위로도 건네지 않는다. 민지에 차를 끓여주고 민지가 먹고 싶어 하는 닭백숙을 만들어 줄 뿐이다. 민지 역시 갈 곳 없는 미소에게 재워주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둘의 사이는 딱 그 정도의 거리감에서 서로를 보듬어 주는 것이었다.
미소는 자신이 거친 모든 공간에서 딱 자기의 몸집만큼의 위로를 남겨두었다. 영화가 따뜻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가 아마 그곳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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