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치열한 내적 투쟁
스무 살의 원점
다카노 에쓰코
책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나의 스무 살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나이 셈법이 달라서 나의 스무 살은 일본 나이로 열아홉이었지만, 어쨌든 ‘스무 살’로 불리던 나이일 때에 대학생이 되었다. 한창 좋은 시절을 예쁜 캠퍼스와 유쾌한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보내다가도, 뜨거운 가슴을 가진 선후배들과 함께 촛불을 켜고 광장에 모여 목청을 높이며 보냈다. 나에게 스무 살은 청춘의 시작이었다. 학생운동의 당위성을 누가 나에게 설득하지 않았어도 이미 내 심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운동권’이 되었다. 그렇지만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내가 떠올린 나의 스무 살은 학생운동을 하던 모습보다는 처음 맛본 자유를 만끽하며 망나니처럼 지냈던 순간들이었다.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의 기쁨을 누리던 짜릿함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아마, 이런 스무 살의 풋풋한 이야기들, 싱그러운 고민이 소개되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가볍게 읽으려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바른 자세로 앉아 읽게 되었다. 다카노 에쓰코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가십으로 읽을 만한 내용은 아니라는 것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P. 17 그런 사태 속에 있으면 역사의 한순간 속에 있다는 긴장감이 어쩔 수 없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더욱더 절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내가 스무 살, 대학교 1학년이 던 때의 사회 이슈는 ‘광우병 소고기’였다. 매해 새 학기마다 도마 위에 오르는 등록금 문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스무 살이었고 기운이 넘쳤으며, 잘 못 된 것을 바로 잡는 행동을 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옳은 것을 행하려고 애썼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했다. 한때는 광화문 광장에서 셀 수 없는 민중들 속에 하나의 촛불이 되어 ‘역사의 한순간 속에 있다는 긴장감’에 도취했던 적도 있었다.
다카노 에쓰코의 삶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가 아니라, 3학년 때, 그 순간을 맞닥뜨리며,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성과 사유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만의 결심이 섰을 때 행동으로 옮긴다.
그가 투쟁을 시작한 시기는 바야흐로 일본의 학생운동 절정기였다. 한국의 80년대 학생운동의 분위기와 비슷했을까? 내가 살아보지 않았던 시대라서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그의 일기에는 짧게 언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뿐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일기가 그의 투쟁을 적나라하고 세세하게 펼쳐 보여주었더라면, 상상도 안 되는 그 시절 일본의 학생운동을 떠올리려 괴로워하며 책을 읽었을 것이다. 오히려 누구나 쓰는 일기 다운 일기, 공백이 여실히 드러나는 솔직담백한 기록들이어서 읽기가 수월했다.
단순히 당대 일본 학생운동의 모습만 나타났다면, 현대의 스무 살 독자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내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카노 에쓰코라는 한 사람이 그 나이에 했던 갖가지 생각들과 고민, 일상의 모습들을 꾸밈없이 드러나 있어서 현재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책이 될 수 있던 것 같다.
P. 12 내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을까?
특히 부모님과는 세대 차이를 느낀다.
P. 45 나는 내 세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저마다 그 사람만의 세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지는 알 수 없다.
P. 157 랭보는 말했다. “내 안에 타인이 있다”고. 내 경우에는 내 안에 타인이 있다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이 통일체가 아니라 다양하게 분열된 내가 무수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나야’라고 생각하는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은 늘 자기 편한 대로 합리화해서 해석하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진짜 나라는 건, 상대는 이렇구나 하고 믿는 건, 합리화가 만들어내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스무 살의 원점>은 다카노 에쓰코가 스무 살이 되었던 1969년 1월부터 그가 열차에 몸을 던져 사망을 한 6월까지의 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일기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을 했고 끝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과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나의 세계는, 타인의 세계는? 하는 타인으로의 확장까지 이루어냈다.
그 답을 찾아냈는지는 사실 알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죽는 순간까지 고민했던 부분이었을 테니까.
그의 일기를 읽으며 그의 고민이 내가 했던 고민과 많이 닿아있음을 느꼈다. 50여 년 전에 살다가 사라진 사람이지만, 기묘하게 연결된 느낌이었다. 공유하는 고민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나를 향한 질문을 멈추어 본 적이 없다. 항상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고민하고 고뇌하여 그 순간에 가장 알맞은 답을 찾아내려 애썼고, 그래서 더 좋은 나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해왔다. 잘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특히 그가 자기 자신을 분열적으로 객관화하여 바라본 ‘다양하게 분열된 내가 무수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고민을 내가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앞에서 잘 웃으며 떠드는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이게 정말 나였나? 이건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하며 고민했던 부분들이 많이 스쳐 지나갔다.
P. 26 ‘혼자라는 것’, ‘미숙하다는 것’, 이것이 내 스무 살의 원점이다.
P. 80 ‘혼자라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자살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 172 「제2의 성」을 읽으니 어떻게 해도 (성교로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인간은 혼자인 것 같다. 두렵다.
나 역시 본디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의 외로움은 누구도 채워줄 수 없을 것에 절망하며 깊은 우울감에 빠진 적도 많았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진한 신체 접촉을 하는 순간에도 외로움이 사무쳐 몸을 덜덜 떨었던 적이 있었다. 스무 살에는 더욱더 그랬다. 지금은? 외로움을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를 알게 되긴 했지만, 외로움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에쓰코는 일기에서 내내 혼자됨을, 외로움을 두려워했다. 다만 외로워하는 것에만 그치진 않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잘 다루어보려고 애를 썼다. 지속적인 자기 성찰과 노력, 근본적인 것을 바꾸어 보려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은 분명 시간 속에 축적되어 성과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게 평생을 외로움을 앓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P. 13 그 무엇도 비하하지 마. 너 자신을 아껴야 해. 너는 서투르지만 무슨 일이든 성실하고 진지하게 하잖아. 다른 사람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잖아.
전반적으로 우울한 배경음악이 흐른다. 가끔 고조되는 베이스 소리에 심장도 덩달아 쿵쿵 뛰기도 한다. 은은한 기타 선율이 멜로디를 만들며 이야기를 구성한다. 그리고 보컬은 희망을 노래한다.
다카노 에쓰코의 <스무 살의 원점>은 바로 이런 느낌이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의 삶은 ‘패배한 삶’으로 읽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뜨겁게 뛰었고, 고민을 삶의 실천으로 녹여냈다. 두려움에 맞서 싸우며 밝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스무 살에게는 비현실적인 배경일지라도 그의 이야기가 울림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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