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과제 무덤에서 살아남기
21. 과제 무덤에서 살아남기
2008년 입학해서 2013년 졸업하기까지 4년(+2년)의 대학 시절을 회상해봤다. 3학년 때까진 학과 수업이나 과제보다는 다른 것에 더 많이 집중을 했고, 2년의 휴학기간을 마치고 복학한 후 마지막 1년은 꽤 열심히 다녔다. 물론 4학년 1학기 때 위기도 있었다. 매일 등교하면서 "오늘은 자퇴하는 날이야." "오늘이야말로 자퇴를 해야지!" 하고 결심하기를 수십 번, 마침내 마음을 고쳐먹고 졸업이라도 무사히 하자는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는 꼬박 한 학기가 걸렸었다.
졸업이라도 하자, 내가 부모님께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가 대학 졸업장이니까.
대충 이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4학년 2학기를 맞이했다가, 예상치 못하게 학과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대학원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큼 열심히 공부를 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결국 겨우 졸업을 하기에 그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나는 시간을 참 낭비하듯 살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가끔 든다. 기왕 다니던 학교, 장학금까진 못 받아도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뭐라도 해볼걸.
하지만 역시 그때 학교 성적 이외에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을 생각하면, 학교 성적이 전부는 아니라는 결론을 다시금 내리게 된다.
다시 주어진 대학 생활이었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 심사숙고해서, 성적에 맞추듯 떠밀려서가 아니라 나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좀 더 선명한 청사진을 그리면서 학교에 왔다.
물론 고비가 없진 않았다. 조금 익숙한 것들이 있다고는 해도 대부분이 난생처음 공부하는 과목인 데다가 영어로 수업을 듣고 소화해야 했다. 과제 또한 난감함의 연속이었다.
개인 과제는 어떻게든 홀로 부딪히고 깨지며 완성해낼 수 있었다. 좋은 학급 동기들 덕분에, 서로 어려워했던 부분을 보완해가며 좀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조별 과제는 여러 가지 난항을 겪었다. 첫째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과제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서로 달랐던 지점이 존재했다.
교수님 말씀을 잘 받아 적는다고 적었는데도 꼭 하나씩 부족한 점이 발견되었다.
내게 있는 나쁜 버릇 중 하나가, 확실하지 않은데도 승부를 걸듯 고집을 부린다는 점이었다. 같은 조원의 한국인 친구가 여러 차례 지적해 주었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맞을 때도 종종 있었지만, 다른 조원의 말이 맞을 때도 있어서 내가 사죄하며 급히 방향을 바꾼 적이 더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조별 과제 중 하나는, 운송 개론 (Introduction to Transportation) 수업의 기말고사 대체 과제로 했던 동영상 찍기 과제였다.
이미 이 과정을 이수했던 사람들의 조언에, 기말 필기시험을 치는 것보다 동영상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 점수가 더 잘 나온다던 귀띔에, 기말고사 시험 과목을 하나라도 줄여보겠다는 욕심에 당차게 도전을 했다. 2명이 한 조가 되어 주어진 주제에 맞는 동영상을 만들어야 했는데, 한국인 친구 S와 처음부터 과제 이해도가 달라 어려움을 겪었다.
여차저차 대본을 만들고 동영상을 찍고, 기본 편집 툴로 어설프게 편집을 마쳤는데 막상 제출할 때가 되니 소리와 영상의 싱크가 안 맞는 문제가 발생해버렸다. 이게 아마추어급도 안 되는 나에게는 고치기 어려운 문제여서 그대로 제출하고 말았는데, 이게 웬 걸, 동영상 과제 점수가 만점이 나왔다.
이 과목은 쪽지 시험도 많이 죽을 쑤고 중간고사도 성적이 좋지 않아서 걱정이 많았는데, 동영상 과제로 점수를 한 방에 역전할 수 있었다.
내 돈으로 수업료를 내고 듣는 수업이니만큼, 과제를 하는 데 있어서도 한 가지 원칙을 세웠었다. 과제 마감 전에 몰아서 허둥지둥하지 않기, 라는 소소한 목표였는데 대부분의 과제는 받은 당일 혹은 다음 날까진 아니더라도 여유롭게 마무리를 짓고 제출할 수 있었다.
스스로 부지런하다고 평가하긴 부끄러운 모습이 너무 많지만, 어쨌든 하나의 과제도 빼먹지 않고 다 해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툭하면 과제를 제출하지 않았던 것에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으니까.
국제 정치경제학 (Global Political Economics) 수업의 마지막 과제이자 개별 과제였던 발표 과제도 꽤 고생을 했던 과제였다. 국제 무역에 관해서 5분짜리 발표를 하는 거였는데, 개인의 경험이 들어가면 좋다는 얘기가 덧붙여 있었다.
나름 한국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했고, 학생회 출신이니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쯤이야 그렇게까지 어렵겠냐는 안이한 생각으로 준비를 했다. 주제를 철강 산업과 세계화로 잡았는데, 6개월 남짓이지만 철강 무역업에 종사했던 경험을 살려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이 어떻게 나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로 발표 가닥을 잡았다.
준비는 어려움이 없었다. 의외로 문제는 발표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났다는 심정으로 제일 먼저 발표를 하겠다고 자원을 했고 덕분에 1등으로 발표를 했는데, 웬걸, 준비한 대본의 절반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국어로 발표할 때와 비슷하게 말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 정도는 감안할 수 있었는데,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란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자만이자 오만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발표를 하더라도 준비만 잘했다면 무리 없이 마칠 줄 알았는데, 내 준비가 부족했던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발표를 한 탓인지, 도무지 무엇을 탓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제일 먼저 발표한 용기를 크게 사준 교수님, 피터 덕분에 넘치는 점수를 받았지만 나는 그 점수가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어쨌든 해냈던 내가 대견하기도 했다. 엉망진창이었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해냈다는 것이 뿌듯함도 느꼈다. 이것 봐, 나 영어로도 과제 발표를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지금까지 했던 과제는 모두 컴퓨터 한 구석에 고이 잘 보관되어있다.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찾아서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재료가 될 수도 있겠고, 혹은 같은 학과에 진학한 다른 후배 한국인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도와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내 과제물이 다른 친구의 과제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과제뿐만이 아니라, 공부하며 필기했던 것들도 아직은 다 보관하고 있다.
공들여 필기한 것을 왜 아무에게나 나눠주느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내 딴에는 아무에게나 나눠준 것이 아니고 도움을 요청한 급우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준 것뿐이었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아무에게 덥썩덥썩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나 보다.
어쨌든 내가 공부하느라 썼던 것이니 필기를 보여준다고 해서 그 내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내게 손해가 되는 부분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시스템이라, 상대방 성적이 잘 나온다고 해서 내 성적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내 필기를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공부 안 할 사람은 안 할 테니까.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소소한 기쁨이기도 했고.
4학기 동안 과제가 버거워서 힘들었던 적을 곱씹으려니, 생각보다 아주 어려웠던 과제는 없었던 것 같다. 모두 수업 시간에 집중 잘해서 들으면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분량과 난이도였다.
너무 수능 만점자의 대답 같겠지만, 결국 공부는 학교 수업 잘 듣고 예습 복습 잘하는 데 달린 것이다. 과제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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