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1학기 끝.
22.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1학기 끝.
공부는 좋아하지만 평가는 싫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익히는 것은 좋지만, 내 성취도가 어떤 기준에 맞춰 줄 세워지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렇지만 나는 학교에서 대부분 성적이 우수한 편에 속하는 모범생이었다.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성적이 잘 나오면 엄마, 아빠가 좋아하니까.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꾸역꾸역 했던 날들이 많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평가받는 것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대학교 다닐 땐 상대평가로 이루어진 점수 기준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공부하지 않아 엉망으로 나온 성적표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절대평가 과목에서라고 좋은 성적을 받은 건 아니었으면서.
캐나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아이엘츠 시험을 공부할 때도 울면서 모의고사를 풀었던 날이 수두룩했다. 영어를 공부하는 자체는 즐거웠지만, 내가 쓴 답안이 평가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 평가 기준에 내 답안을 잘 끼워 맞출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세네카에서 공부를 하는 날도 그러했다. 갑자기 수업 시간에 퀴즈를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을 해 주먹을 꽉 쥐거나 이를 앙 물고 있기도 했다. 퀴즈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않은 척, 괜찮은 척은 했지만 속은 하나라도 틀리면 나 스스로가 바보 멍청이 같아서 쩔쩔맸다.
그러니 중간, 기말고사 시험은 어떻겠는가.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시간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중간고사가 있는 시기를 기점으로 일주일간 짧은 휴식기를 가진다. 4년제 이상 대학교에서 먼저 일주일을 쉬고, 그 이하의 대학은 그다음 주에 쉬게 되는데, 학교마다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스터디 위크 Study Week, 혹은 리딩 위크 Reading Week라고 불린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간고사를 대비해 공부를 해두라고 정해진 기간인데 이 동안엔 수업이 없다. 방학 아닌 방학인 것이다.
친절한 교수님들은 이 스터디 위크 이전에 중간고사 시험을 배치해 스터디 위크 동안 편히 놀고 쉴 수 있게 해 주신다. 아닌 교수님은 스터디 위크가 끝난 후에 중간고사 시험을 배정하시는데, 이게 아니더라도 대게는 중간고사 대체 과제 혹은 중간고사 없이 틈틈이 쪽지 시험 친 것으로 성적을 내는 교수님이 많았다.
그 덕분에 세네카에 다니는 4학기 내내 스터디 위크는 여유롭게 지나갔다. 근교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집에서 내내 뒹굴거리며 쉬기도 하고. 이 좋은 제도가 한국에도 도입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가, 실제 4년제 이상의 대학교에서는 이 기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겠지, 하는 상상도 했다가.
그리고 기말고사가 끝이 나면 학기는 모두 마무리가 된다.
1학기 첫 기말고사, 그동안 평소에 열심히 수업도 듣고 과제도 잘하고 출석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중간 성적이 기대 이하였던 과목이 하나 있었다. 문맥을 넘어선 소통(Communicating Across Context), 소위 '컴COM'이라고 불리던 영어 과목이었다. 한국에서 배우듯 문법, 독해 위주의 영어 수업이 아니라 상황이나 맥락에 맞는 영어 쓰기 수업이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도 애를 먹었고 시험을 준비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쉬운 과목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이것보다 어려운 과목은 없었던 것이다.
한국어로 사고하고 읽고 쓰기에 익숙한, 아니 한국어로 내 생각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내 뜻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효과적인 글쓰기를 잘 활용할 줄 아는 나에게는 새로운 언어로 한국어만큼의 능률을 뽑아내는 글쓰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기 쉬웠다. 다양한 접근법과 방향성,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글쓰기를 하는 것, 제2 언어로는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조차 난항이었다.
아이엘츠 시험을 위해 공부하던 때가 생각이 나며 나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에 또 울어버리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험 날은 다가왔다.
이 과목의 교수님과는 수업을 듣는 한 학기 동안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을 많이 쌓아서인지 기말고사가 끝나면 더는 얼굴 볼 일이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굉장히 컸다. 공부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쏟아내 시험을 마치고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에 그쳤지만 준비했던 작은 선물과 함께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수업 시간에 출석만 체크하고 교실을 떠난 학생들이 굉장히 많았음에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수업을 잘 진행해 주셨고, 또 그만큼 배운 게 많았다. 기회가 된다면 이 교수님의 다른 수업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기말고사를 무사히 잘 마치고 1학기가 끝이 났다.
성적 걱정은 미루고 방학을 맞이해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2019년 12월, 세네카에서의 1학기를 돌아보니 참 열심히 공부했고, 매사에 진심을 다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열과 성을 다해 더 잘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2020년 3월에 밀려오게 된다.
아무튼 걱정했던 것에 비해 1학기 성적은 우수하게 마무리했다. 수업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과제를 성실히 수행했으며 중간과 기말고사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치른 덕분이었다. 성적표는 한국에서 확인했는데, 이 이후에 더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나에게 성실함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을 했는데, 실은 내게 가장 큰 무기는 '성실함'이었다. 뭐든 쉽게 질려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꾸준히 한 가지를 파고들기를 잘했다. 주변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내 중심을 잃은 적은 없었고, 그 덕분에 학교 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었다.
이 성적표는 남은 3학기 내내 이어졌다. 어떨 때는 플러스(+)가 더 많은 성적표를 받고 어떤 때는 그냥 A가 더 많은 성적표를 받기도 하고. 남들과 경쟁하기보다는 나 자신과 싸우며 공부했던 시간이 성적으로 보답받았던 것 같아서 뿌듯한 시간이었다.
세상 일이 이렇듯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는 거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여전히 평가받는 것은 싫다는 생각이 뒤섞였다.
취업에 성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아니라고도 하고, 성적이 좋아봤자 쓸 데가 별로 없다는 이야기도 많이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없어지진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나의 약점을 직시하고 강점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내게 가장 부족해던 자신감을 성적표로 향상했다는 것이 좀 우습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성과였다.
시험이 끝나면 가장 기쁜 것은 더 이상 시험을 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만, 역시 시험이라는 평가 단계가 없었다면 내가 이만큼 공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역시 시험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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