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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23. 한국에서 온 퀴어 페미니스트 유학생 1

by 희연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23. 한국에서 온 퀴어 페미니스트 유학생 1


세네카에 입학하기 전, 학교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았던 정보 중 눈에 띄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교내 성소수자 모임이 있다는 정보였는데, 그래서 학교에 대한 호감도가 더 올라갔더랬다. 그런데 막상 입학하고 학교에 다니다 보니 순식간에 변한 주변 환경에 나를 이리저리 끼워 맞추느라 성소수자 동아리에 관해 입력해 두었던 것이 홀랑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랬다가 학내 스크린 광고로 뜬 LGBTQ+ 모임에 관한 공고를 보게 되었다.

LGBT+ 주간 모임 공지와 게시판 공고

바이섹슈얼로 정체화하고 나서도 한국에서는 딱히 성소수자 모임이라고 정해진 데엔 나가본 적은 없었다. 그런 모임을 찾아가지 않았어도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필요성을 못 느꼈던 건데, 홀로 캐나다까지 오니 퀴어 친구가 그리웠다. 그래서 모임에 참석했다. 캐나다를 가면 꼭 여자 친구를 사귀고 말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들을 성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흑심도 물론 아주 약간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아니 사실 어느 정도 예감은 했던 의외의 만남이 있었다. 일찌감치 도착해 자리 잡고 앉아 있었는데, 시간 맞춰 들어오는 한 무리의 학생들 중에 이미 익히 알고 지냈던 A가 끼어 있던 것이었다. 서로를 보고 놀라 "어, 너도? 야, 나두!" 같은 순간이 스쳤다.

이런 말이 조금 무례했을지는 모르겠지만, A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친구는 무조건 퀴어다!"하는 감이 일찌감치부터 있었다. 그래서 모임에서 A를 보았을 때도 모임에 나타났다는 사실보다는 나보다 먼저 이미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만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A는 내 등장을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는지 놀란 표정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이 날을 계기로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퀴어는 퀴어에게 마음의 벽을 쉽게도 허문다지.

(위 좌측) 성소수자의 상징 (아래 가운데) 바이섹슈얼의 상직 (위 우측) 트렌스젠더 상징

LGBTQ+ 모임은, 다양한 연령, 학과, 배경, 성별의 사람들이 모였고 그래서 모임 초반엔 늘 자기소개를 했다.


영어에서 아직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대명사(Pronoun)'다.

원래 한국어엔 3인칭을 호명할 때 성별이 없다. 남자든 여자든 '그'로 통일했는데, 영어를 번역하기 위해서, 혹은 일본어에서 따와서 등등 다양한 어원이 있는 '그녀'가 생겨났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은 한국어 화자에게도 '그/그녀'의 구분이 낯선 것이 아니지만 영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He/그녀She를 헷갈려하곤 한다.

거기에 익숙해질 만 해졌더니, 요즘의 대세는 그들, They가 되기 시작했다. 3인칭의 복수형인 '그들'이 아니라 '그'도 '그녀'도 아닌 3인칭 단수형 '데이They'의 등장이었다. 초반엔 혼란이 가득했다가 요즘엔 대충 성별을 모르겠으면 '데이they'를 쓰는 습관이 붙었다. 아직도 they 뒤에는 자연스럽게 '얼are' 이 따라오긴 하지만.


나는 오래전에 '시스젠더 바이섹슈얼 여성'으로 정체화했는데, LGBTQ+ 모임에 처음 참여해 자기소개 차례가 왔을 때, 나의 대명사를 이야기할 때 "그/그녀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He, She, Him, Her, everything is okay)"라고 소개하곤 했다. 처음 이렇게 이야기했을 땐, 정말 그랬다. 상대방이 나를 여자로 보든 남자로 보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성별로 보든, 내가 나를 시스젠더 여성으로 정체화한 것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니 편한 대로 대하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것이 자칫 오만하고 건방진 말로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간 모임에 참여할 수 없는 LGBT+를 위한 상담소(?)

나는 운이 좋아서 나의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이 알맞게 맞아떨어졌다. 처음 트랜스젠더 친구가 생겼을 때야 비로소 내 성별에 대한 고민을 했다. 무엇이 나를 여성을 규정짓는가. 나에게 여성의 생식기가 있다는 사실이? 주민등록번호가 2로 시작한다는 것이? 그것도 아니면 검사해 본 적도 없는 내 염색체가 XX라는 것 때문에? 사회에서 나를 여자로 보니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정신 상태로 남성의 성기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남성의 성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내가 나를 남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사회에서도 나를 남자로 대우해주면 거기에 내가 맞춰서 남성으로 자랐을까?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자랐기 때문인지 남자로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면 내 삶이 지금보다 더 고달팠을 것 같다는 느낌만 남았다. 다행히 지금의 나를 여성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다양하고 분명한 지표들이 있지만, 왠지 그 지표들이 없었어도 나는 나를 여성으로 규정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나처럼 운이 좋은 사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 표현하는 것도 무식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태어날 때의 생물학적 성별과 자라면서 스스로 규정하게 되는 성별이 다른 사람들, 영미권 문화에서 그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칭할 "대명사"에서 정체화를 시작한다. 그 대명사에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이 보기를 바라는 희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이 미친 순간부터 "나를 어떤 대명사로 부르든 상관없어"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여전히 남녀 성별을 갈라야 하는 영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있을지라도 나를 여성으로 지칭할 '그녀 She/Her'라는 표현을 쓰는데 조금 부드러워져 보기로 했다.


세네카에서 또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새로 지어진 건물에 생긴 성중립 화장실이었다.

세네카 홈페이지 캡처

새 건물에만 성중립 화장실이 있는 건 아니었고, 위 사진처럼 원래도 성중립 화장실은 있었다. J동까지 있는 뉸햄 캠퍼스에서 단 세 군데, 세 칸만 있었을 뿐. 새로 생긴 건물은 층마다 성중립 화장실이 크게 지어졌다.


처음에 별 신경 안 쓰고 들어가서 이용했던 새 건물의 성중립 화장실은, 모든 칸이 위아래로 꽉 막혀 있어 다른 화장실이랑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참, 놀랍게도 캐나다의 보통(?) 화장실은(남자 화장실도 그런지는 확인해 본 적이 없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이 된다) 칸막이 위아래가 뻥 뚫려 있다.

캐나다 살이 초창기에는 화장실 칸막이의 위아래 틈새가 너무 낯설었다. 한국에 있을 때처럼 누군가가 위나 아래 틈새로 카메라를 든 손을 쑥 집어넣을까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 두려움은 다행히 금방 사라졌고 뻥뻥 시원하게 뚫린 화장실에 금방 익숙해졌다.

그래서 세네카의 성중립 화장실을 처음 들어갔을 땐, 칸막이에 구멍이 없어 신기하다는 생각 정도만 들었지 그게 성중립 화장실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랬다가 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씻을 때 옆에 남자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어서 놀란 경험을 하고 난 후로 입구를 살펴보니 성중립 화장실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요즘의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다. 2017년인가 서울 퀴어 문화 축제에서 간이 성중립 화장실을 설치했을 때의 잡음을 생각하면 아직 한국 공공기관에서 성중립 화장실을 보기란 요원한 일이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학교에서 함께 어울리던 한국인 친구들이 "성중립 화장실은 찝찝해서 못 쓰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서서 소변을 보는 남자들이 쓰는 변기를 공유한다는 것이 불결하고 불편하다는 요지였는데, 그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그 화장실만이 유일한 대안인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표현이었을 것 같았다. 사실 여자라고 화장실을 마냥 깨끗하게 쓰는 것도 아니긴 한데.


세네카에서뿐만 아니라 성중립 화장실은 토론토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큰 백화점, 몰에만 가도 가족 화장실, 성중립 화장실이 꼭 있었고 그래서 캐나다는 정말 다양성의 나라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퀴어 페미니스트' 유학생으로 퀴어에게 안전한 물리적, 심리적 공간이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자 위로였다. 한국에서 퀴어라 배제당하고 차별당한 경험이 많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온 사회가 나를 없는 사랍 취급하며 거부하는 느낌에서 벗어나, 모두가 다정하고 상냥하며 나를 환영한다고 느끼게 해주는 곳으로 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너그러워진 건 사실이었다. 사소한 것에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존재를 증명하려 애쓸 필요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불필요한 곳에 에너지를 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찾아온 것이다.


애석하게도 2020년과 2021년 토론토 퀴어 퍼레이드는 코로나 대유행 탓에 취소가 되어, 다양성의 나라 캐나다에 온 지 2년이 넘었는데도 그 유명한 토론토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해본 적이 없다. 부디 2022년엔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2021년 2월 세네카에서 진행한 드랙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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