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한국에서 온 퀴어 페미니스트 유학생 2
24. 한국에서 온 퀴어 페미니스트 유학생 2
단언컨대 캐나다행을 결정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생각했던 것이 "페미니즘 전사로 살고 싶지 않다"였을 것이다. 처음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러 나라 중 캐나다를 골랐을 때는 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 하나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리라, 적당히 퀴어 친구들 만들어서 예쁜 여자친구 사귀고 나만의 안분지족을 꾸려나가며 살아야지. 불의에 항거하며 싸우지 않고, 그냥 적당히 물 흐르듯 살아야지. 그러려고 고른 캐나다였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뒤로 피곤한 일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페미니즘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하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지치는 일이었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오염되었다느니, 네가 하는 건 페미니즘이 아니라느니. 그러면 그냥 페미니스트가 아닌 채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이미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린 뒤로는 되돌릴 수 없어서 계속 피곤하게 살게 되었다.
캐나다로 도망을 치면 좀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말이 잘 안 통하니까 대충 넘어가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인종차별 당할지도 모르겠지만, 또 사회에서 소수자라서 우대받을 경우도 있을지 몰라. 일단 법에서 소수자 차별을 안 하니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도 그렇겠지.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면 좀 살아볼 맛이 날 것 같았다.
퀴어 친구를 만들고 싶었어
캐나다에 와서도 내게 퀴어 친구들은 필요했다. 학교에서 LGBTQ+ 모임에 오는 친구들은 대게 20대 초반이라 조금 세대 차가 나는 느낌이었다. 또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만날 수 있을지는 몰랐다. 학교 밖에서 퀴어 친구들을 만들고 싶었는데, 마침 토론토에서 바이 페스티벌이 열리는 소식을 알았다.
이거 안 갈 수가 없지!
부제목으로는 아트 페스티벌이 붙었다. 퀴어 중에 예술가가 많은 건지 예술가 중에 퀴어가 많은 건지, 아무튼 퀴어들의 행사에서 예술이 빠질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좋은 행사에 혼자 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학교 LGBTQ+ 모임에서 만난 A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A는 바이는 아니었지만, 토론토에서 열리는 퀴어들의 행사를 구경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토론토 다운타운까지 나들이 겸 다녀왔는데, 서울에서 열리는 퀴어 페스티벌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조금 다른 경험이었다.
최초의 서울 퀴어 페스티벌이 이랬을까? 작은 공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의 예술 작품을 전시, 판매하고 성 정체성에 관한 책자나 지역 모임 책자를 곳곳이 비치해 두었다.
토론토는 매년 6월 퀴어 페스티벌이 성대하게 열린다. 모든 퀴어들을 아울러 열리는 행사니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랬던가. 그래서 그런지 바이들만의 커뮤니티도 잘 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소심하고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기 어려워하는 내게, 이날 새 친구가 생기는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이 이후로 코로나가 덮쳐 이런 기회가 다신 없을 줄 알았다면 가볍게 훑듯 둘러보는 게 아니라 매대를 지키고 앉아있는 여러 사람에게 더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는 아주아주 늦게 하게 되었다.
한국 페미는 캐나다에서도 페미더라
토론토에 입성한 지 한 달이 되었고 자원봉사를 할 만한 게 없을까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중이었다. 자원봉사를 하다 보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소소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페이스북에서였나 기억이 잘 안 나지만 페미니즘을 기조로 하는 행사에 자원봉사를 구한다는 공고를 발견했다. 별다른 면접이나 사전 인터뷰 없이 쉽게 할 수 있었는데, 바이 페스티벌이 끝난 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은 날의 행사였다.
행사의 제목은 <Take Back the Night> 우리의 밤을 되찾자, 였다.
금요일 수업을 마치고 잘 준비해서 행사가 열리는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낯도 많이 가리는 주제에 이런 데 참여할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 누구도 내게 먼저 말 걸거나 챙겨주지 않았지만 어찌저찌 내 자리를 찾아 행사에 잘 참여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면 친구를 여럿 사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내내 남았다.
행사의 피날레는 다운타운 밤거리를 함께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안전하게 밤거리를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슬로건이 너무 명확하게 와닿아서인지 낯선 영어 구호도 빨리 입에 붙어 곧잘 외칠 수 있었다. 동시에, 어느 정도 이상향에 가깝다고 생각한 캐나다에서조차 여성들이 밤거리를 다니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다.
한국의 거리 시위와 다르게 느껴진 점은, 도로를 점거하고 차량이 다니지 못하도록 막았음에도, 운전자들이나 시민들이 불편해하기보단 행진을 모두 응원해주었다는 것이다. 운전자들은 구호에 맞춰 경적을 울려주기도 했고, 버스에 탔다가 발이 묶인 시민들도 창문 너머로 함께 구호를 외쳐주기도 했다. 그냥 걷던 사람들이 행진에 합류하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모두가 안전한 거리를 위해 함께 마음을 보태준다는 것에 더욱 힘이 났다.
어쩔 수 없나 봐, 나는 캐나다까지 와서 페미니스트로 살아야 하나 봐.
페미는 참지 않지
학교생활에 얼추 익숙해진 즈음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의 전투력을 뽐낼 기회가 찾아왔다. 국제 정치경제학 수업 시간에 등장한 한 만평 그림이 내 전투력을 자극했다.
세계 경제 역사를 배우던 시간이었는데 1929년 대공황 시기의 만평이 눈에 들어왔다. 담당 교수 피터는 재미있는 유머 정도로 생각하며 만평을 소개했는데, 남자 둘이 대공황과 여성의 우울을 빗대 농담을 하는 장면이었다. 우울증은 영어로 디프레션 Depression, 대공황은 영어로 그레이트 디프레션 Great Depression, 즉 동음이의어로 재미있게 풀었다면 정말 재치 있었을 뻔했던 농담이었다.
문제는 이 농담을 풀어낸 방법이었다.
남자 하나가 아내에 대해 불평한다. "아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어." 다른 남자가 대답한다. "돈을 주고 백화점을 가라고 해."
대공황을 극복한 방법으로 정부가 개입해 각종 구제 정책을 펼친 것을 우울증을 겪는 여성은 돈으로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에 빗댔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명백한 여성 혐오였다. 여성의 우울증을 가볍게 보는 것, 여성의 경제적 주체성을 무시한 채 남성이 주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여기는 것.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여성을 대상화한 것 등등, 여성 혐오가 아닌 이유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곧바로 문제를 지적하지는 못했다. 수업 중간에 흐름을 끊고 교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내 안의 유교 걸이 제지를 하고 나섰다. 영어로 아직 내 생각을 완벽하게 말하지 못하는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문제를 제기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을 것도 두려웠다. 피터라는 교수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이 문제로 나에게 나쁜 인식을 갖고 앞으로 남은 학기 동안 내게 점수를 나쁘게 주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진 않았다.
남은 수업 시간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느라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좀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싶어서 캐나다로 왔다. 그런데 아직도 여성을 대상화하는 만평을 수업 자료로 보고, 거기에 대해 내가 한 마디도 못 하고 불쾌한 마음만 품고 살아야 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사가 되기 싫어서 도망쳐 왔지만, 내 마음속에 웅크려 있던 전사의 영혼은 언제든 깨어나 싸울 준비를 하며 살고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말하면 된다. 지금 내가 불쾌함을 느꼈지만, 다음 학기의 학생 중에선 나와 같은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실을 나서려는 피터에게 다가갔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업 자료로 쓴 그 만평은 여성 혐오적이었고, 나는 굉장히 불쾌했다."
그 만평이 여성 혐오적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첫마디를 내뱉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피터는 곧바로 사과의 말을 먼저 건넸다. 네게 불쾌감을 주어서 정말 미안하다, 이 자료는 폐기하고 앞으로 사용하지 않겠다.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자료일 거라는 생각을 못 했다는 말도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대답이면 양호하지 않나?) 용기를 내서 말해주어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았다.
구구절절 혐오가 왜 혐오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전에 인정하고 사과하고 교정을 약속한 것에 괘씸함도 느꼈다. 한 번만 더 생각했으면 이 자료가 여성 혐오적인 것을 분명 눈치챘을 텐데, 내가 말하기 전까지 모르고 사용했다는 것이 괘씸했다.
그리고 수업 자료는 그 만평이 삭제된 버전으로 새롭게 게시가 되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페미니스트로 살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는데.
한국에 있는 친구의 추천으로 2020년 2월에 열린 권김현영 선생님과 한채윤 선생님의 강연에도 참여했다. 이날을 인연으로 토론토 페미니스트 그룹인 윈드 WIND에도 합류하게 되었다. 2020년 9월부터는 총대를 메고 세계 곳곳에 퍼져 사는 한국인 여성들만의 온라인 독서 모임을 꾸렸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벌써 1년 넘게 진행되어서, 함께 책을 읽고 각자의 사유를 나누며 우리만의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산다.
캐나다에 와서도 퀴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감추며 살 수가 없게 된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퀴어 페미니스트로 살아야지.
아마도 평생 이러고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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