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겨울왕국
25. 겨울왕국
캐나다행을 결정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이 '겨울'이었다. 나의 고향은 경남 거제. 그곳에서 20년 가까이 살면서 눈이 온 걸 본 적은 한 손에 꼽는다. 한겨울에도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일이 적은 동네에서 살다가, 춥기로 정평이 난 캐나다로 간다니.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데 난 어릴 때부터 눈을 참 좋아했던 모양이다.
내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아도 사진에는 선명히 찍혀있던 어느 겨울날. 난생처음 본 눈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고향에서 본 첫눈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리고 이때로부터 한 십 년 정도 더 지나서 열넷, 다섯 살 때쯤에도 거제도에 눈이 왔다.
그날은 기억이 난다. 저녁에 함박눈이 펑펑 내려서 옷을 두껍게 껴입고 동네 친구들과 놀이터로 뛰쳐나가 눈사람을 같이 만들었다. 그리고 사진도 다 같이 찍었을 텐데 그 사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또, 고1 때 학교에서 하교하던 길이었나, 하늘에서 아주 가느다란 눈발이 날렸던 겨울 낮이 기억에 있다.
살면서 눈을 본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서울로 대학을 다니게 되면서 눈이 오는 날은 내가 가장 신나는 날이 되었다. 서울은 참 신기하지, 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3월에도 눈이 내리고 말야. 새내기였던 나는 새로 시작한 대학 생활과 눈이 오는 봄날에 홀려있었다.
그리고 또, 눈을 싫어하게 되었던 날도 너무 선명히 떠오른다. 학교 앞 반지하에 살던 때였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는데, 2월이던가, 집 밖을 한 발짝도 안 나가고 지냈던 적이 있었다. 유일하게 이불 밖을 기어 나오던 때는, 키우던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워줄 때뿐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동안 내 밥을 제대로 챙겨 먹은 날이 별로 없다.
눈이 아주 많이 오던 날의 적막과 공포가 아직도 선명하다면, 나는 여전히 그 우울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지하는 비가 오는 날에도 빗소리가 머리 위에 쏟아지는 듯이 들린다. 그래서 속이 시끄럽다.
눈이 오는 날은 정반대다. 높게 달린 창문으로 비쳐 보이던 쌓인 눈. 창문을 절반이나 가릴 만큼 눈이 와 있었다. 그리고 눈은 소리를 흡수한다는 걸 체감했다. 바깥에 종종 들리곤 했던 차가 굴러다니는 소리, 사람들 돌아다니는 소리, 심지어 옆집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소리도, 눈에 다 먹혀 버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이 나의 우울을 증폭시킨다는 것도 이날 처음 알았다.
마치 내가 관짝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캐나다에서 첫눈을 맞이했던 날도 기억이 난다. 펑펑 내리던 눈. 금세 도로를 뒤덮은 하얀 눈.
그 눈은 스무 살의 나를 다시 데려왔다. 3월에 눈에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다녔던 새내기 희연이.
다시 눈이 좋아졌다.
얼마 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지금 사는 곳은 베이스먼트, 그러니까 반지하인데 이상하리만치 눈이 오는 게 무섭고 불안하지 않았다. 아, 사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회사에 출근 안 하고 재택근무가 가능해진 것이 신났던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밤새 내린 눈은 오후가 다 되어서야 그쳤다. 출입문이 눈에 가로막혔는데도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우스운 일이지, 눈 때문에 괴로워했던 일은 마치 꿈같기도 할 정도니까.
같이 사는 짝꿍은 눈이 그치자마자 제설작업에 돌입했다. 기온이 그 주 내내 영하를 유지할 예정이어서, 당장 치우지 않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집안에 갇히게 되는 꼴이었으니까. 그리고 짝꿍이 눈을 다 치우는 데는 장장 3시간이 걸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은 하우스에 딸린 반지하 방이다. 거실도 있고 방도 두 칸이지만, 남의 집에 렌트비를 주고 사는 중이다. 이런 주거 환경이어도 치워야 할 눈이 이렇게 많은데, 나중에 ‘우리 집’이 생긴다면, 그 집에 살면서는 눈 치우는 일이 얼마나 더 많아질까.
그런 걱정조차도 나는 너무 즐겁다. 눈이 많이 오는 날, 전기가 끊기는 경험은 분명 끔찍하고 지옥 같겠지만, 대자연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낀다며 그 경험에 대해 또 글을 쓰고 있겠지.
짝꿍은 눈을 치운 뒤에, 이젠 겨울이 싫으니 따뜻한 데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꺄르륵 웃으며, 그러면 같이 거제도로 갈까? 하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겨울의 나라가 싫지 않다. 연일 영하 20도를 웃도는 날씨가 이어져 2003년식 도요타 코롤라의 시동이 안 걸리는 날이 많아져도. 출근 길에 도로 옆에 내 키만큼 쌓여 있는 하얗지만 군데군데 오염되어 누르스름한 자국이 남아있는 눈의 산에 비친 아침 햇살이 내 두 눈을 맹렬하게 찔러대도.
그래, 아직은 캐나다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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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캐나다에서도 한 번 살아보지, 뭐> 매거진 연재를 잠시 중단할 예정이었습니다. 유학 이민 준비에서부터 영주권을 딸 때까지 쓰려던 에세이였는데, 영주권을 따기 전까지 특기할만한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죠. 영주권을 따고 난 후에 복기하며 에세이를 다시 쓰자는 마음을 먹었다가, 혹시라도 저의 캐나다 일상을 궁금해 하실 구독자분들이 있을까 싶어서 이전처럼 한 달에 한 편씩 꾸준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일상에 제약이 많아진 이후로 어떤 이야기를 채울 수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2022년에도 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