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캐나다의 사과와 호주의 사과, 그리고 한국의 사과
26. 캐나다의 사과와 호주의 사과, 그리고 한국의 사과
아침에 일어나면 졸린 눈을 채 뜨기도 전에 사과를 한 개 꺼내 반으로 자르고 또 반으로 잘라 속의 씨를 도려내고 먹기 시작한다. 사과를 이렇게 잘 깎을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4등분 해서 가운데 씨 부분을 그냥 일자로 잘라내곤 했다. 사과 살을 대부분 버리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엄마처럼 썩 잘 깎을 수 있게 된 것에 매일이 내심 뿌듯함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사과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 어릴 땐 분명, 아침을 먹느니 잠을 더 자겠다는 쪽을 택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리 늦어도 아침에 간단한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사과는 간편하면서도 영양소가 골고루 갖춰있다는 착각을 하기 쉬운 과일이라 근래에 아침마다 사과를 챙겨 먹게 되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An Apple A Day Keeps The Doctor Away", (매일 먹는 사과 하나로 의사와 멀어질 수 있다.)라고도 하니까. 사과를 오물오물 씹으며 뇌를 깨우기도 한다.
한국에서 살 때는 사과의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가족과 살 때야 엄마가 사 오는 사과로 무슨 품종인지도 잘 모르고 주는 대로 먹곤 했었고, 자취할 때는 과일을 사뒀다가 냉장고에서 썩히기를 여러 번 하는 바람에 과일 자체를 사는 걸 기피하기도 했었다.
본격적으로 사과를 챙겨 먹게 된 것은 캐나다에 온 이후부터였는데, 사과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이 사과 중에서 맛을 본 것은 몇 개 안 된다. 어떤 사과를 먹어야 할지 몰라 처음엔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어디서 푸지(Fuji)라는 품종이 한국에서 먹던 사과랑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처음엔 푸지 사과를 많이 사다 먹었다. 그다음으로는 이름부터 꿀처럼 달 것 같은 허니크리스프(Honeycrisp) 사과를 먹어봤었는데 둘 중에 비교하자면 푸지가 더 나았다. 허니크리스프가 이름만큼 달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배반하기로는 레드 딜리셔스(Red Delicious) 사과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이름부터 '나는 빨갛고 맛있는 사과란다'하고 뽐내는 주제에 맛대가리가 없어서 지금은 이게 얼마나 맛이 없었는지조차도 잊어버릴 정도다.
지금은 로얄 갈라(Royal Gala)라는 사과만 주구장창 먹는다. 지금껏 먹어본 것 중에서는 제일 달고 맛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같은 품종의 사과라도 어느 식료품 시장을 가는지에 따라 사과 알의 크기와 당도가 조금씩 달랐다. 집 앞에 저렴한 곳으로 간다면 사과 알은 내 주먹만 하거나 그보다 작고, 단단하긴 해도 달달하진 않았다. 집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곳에 있는 유기농 식료품 시장으로 가면 사과 알은 내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만큼 크고 빨간 데다가 달콤하기 짝이 없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적당한 타협으로 그 중간 정도 되는 곳으로 가면 내 예산안에서 적당히 맛있는 로얄 갈라 사과를 살 수 있다.
매년 9월 즈음이면, 사과 따기를 체험할 수 있는 농장이 여러 군데 있다. 재작년 9월에도 친구들과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사과 따기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또 입구에서 바구니를 사면 바구니에 담기는 만큼 사과를 따서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체험이라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날씨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농장이 넓어 산책이나 데이트, 혹은 가족 나들이로 찾아오기에도 적당해 보였다. 바구니 가득 사과를 따서 돌아오는 길에, 생각보다 나는 사과와 인연이 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014년-2015년,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로 갔을 때, 호주 남쪽의 작은 섬(?) 태즈매니아Tasmania에 있는 론세스톤Lonceston에서 4달 정도 농장일을 하며 지냈던 적이 있었다. 다양한 작물을 땄지만, 그중에 사과 따기는 쉬운 편에 속했는데 그에 비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넷이 한 팀이 되어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미터인 상자를 채울 때마다 금액을 계산할 수 있었는데, 하루 종일 따 봐야 하루에 네 상자 채우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사다리를 타고 사과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뻗어 가장 끝에 달린 사과를 따서는 한 입 베어 물고 그대로 바닥에 버리는 쾌감이었다. 아무 사과나 그럴 수는 없었고, 땄는데 상품성이 없을 만큼 알이 작거나, 새가 한 번 쪼아 구멍이 난 사과만 그렇게 먹고 버리기가 가능했다. 그렇게 한 입 먹었던 사과는 어찌나 달고 상큼하고 시원했던지. 고된 노동의 육체적 고통을 상쇄할 만한 달콤함이라고까지 말할 순 없어도, 무더운 햇빛에 목을 축이는 상큼함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사과 따는 일을 한 것이 호주에서가 처음은 아니었다. 2008년 스무 살 때 대학에서 경북 영주로 농활을 갔던 때가 내 기억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사실 농활을 가는 시기는 미묘하게 농번기를 피해 있어서 적당히 바쁘지 않으면서도 농촌 체험을 할 만큼 일을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때는 "농촌 봉사활동이 아니라 농촌 연대 활동"이라는 말이 그렇게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해 주었다.
첫 농활은 봄에 떠난 3박 4일짜리였는데 사과 꽃따는 일을 주로 했다. 적당한 개수의 과실이 맺히게 하려면 가지마다 핀 꽃을 봄에 솎아내 줘야 했는데, 가위로 하얀 사과꽃을 따며 봄볕에 꾸벅꾸벅 졸았던 것이 유달리 기억에 남았다.
두 번째 농활은 가을에 갔던, 역시 3박 4일짜리 농활이었고 사과를 왕창 수확해야 하는 피크 시즌은 이미 지난 터라 대학생인 우리가 할 일은 그때까지 나무에 남아있는 알이 작은 사과를 대충 따서 주워 담는 것뿐이었다. 가을볕에 얼굴이 타지 않도록 새참 때마다 사과나무 그늘아래 앉아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하나 집어 들고 벌레 먹은 부분만 잘라낸 다음 먹었던 사과의 달콤함이 여전히 혀끝에 맴도는 것 같다.
사과 하나로도 내 기억 속에 헤집을 것이 이렇게 많았다니. 새삼스럽게 정말 많은 일을 겪고서 여기 캐나다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매킨토시(McIntosh) 사과가 식료품 시장에서 보인 게 반가워서 로얄 갈라 사과와 함께 몇 개 집어 들어왔다. 매킨토시 사과는 재작년 사과 따기하러 갔을 때 나무에서 따자마자 먹었던 바로 그 사과였다.
짝꿍은 한때 매킨토시 사과를 제일 좋아했었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품종을 시장에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시장에서 보였을 때 더 반가웠던 것 같다.
어쩐지 두 사과의 맛을 비교하며 먹어보고 싶어 로얄 갈라 사과와 매킨토시 사과 둘 다 함께 썰었다. 푸르스름하게 하얀 쪽이 매킨토시 사과였는데, 웬걸, 그때의 달콤함은 간데없고 시큼새큼하고 아삭한 식감만 남아있었다.
역시 맛을 좌우하는 건 먹을 때의 분위기와 환경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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