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우리 그만 만나자.”
지영은 눈을 피하지도 않고 말했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지영의 눈을 피한 건 소예였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물어보지를 못하고 창밖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만 응시했다. 오래된 노래 가사처럼,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그렇게 겨울비가 내리는 저녁, 소예는 지영과 이별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너를 너무 귀찮게 했니? 너는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데, 내가 너의 모든 시간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었니? 그게 아니면 그냥 내가 지겨워져서 그래? 8년은 한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지겨워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생겼니? 그래서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나를 떠나려 한 거니?
지영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소예는 차마 던지지 못한 질문을 쏟아냈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인지 눈물이 함께 흐르지는 않았다. 참 다행인 일이었다. 단골 카페라 사장님도 알바생도 소예의 얼굴을 다 알았다. 우는 소예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 물었을 때, 소예는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소예의 인생에는 지영이 가득 차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만나기 시작해, 자그마치 8년이었다. 지영이 없는 생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일을 공유하며, 차근히 함께 살림을 꾸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지영은 소예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소예는 내일도 출근을 해야 했고, 지루할 뻔했던 일요일의 마무리를 지영 덕분에 엉망으로 보낼 수 있었다. 소예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잠시만요.”
카페 알바생이 소예를 뒤쫓아 나오며 불렀다. 소예가 뒤돌아보니, 작은 체구의 알바생이 제 키 만한 장우산을 들고 있었다. 우물거리며 우산을 불쑥 내밀고 말을 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데 우산을 안 가져오신 것 같아서요.”
소예는 알바생과 우산을 번갈아 보았다. 얼굴은 익히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카페 알바생. 저 아이는 내 이름을 알기나 하는 걸까? 내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나 하는 걸까? 내가 지금은 이 작은 호의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소예는 힘없이 웃었다. 알바생은 이거라도 쓰고 가시라며 소예의 손에 우산을 굳이 쥐여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비는 맞지 마요.”
다정한 마음씨가 소예의 언 손을 녹였고, 보드라운 빗줄기가 소예 주변을 감쌌다. 감사합니다, 하고 예의 바르게 대꾸한 다음 소예는 다음 말을 망설였다. 방금 여자 친구에게 차인 사람이 다른 여자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건 좀 우스운 꼴일까? 하지만 이게 다 비 때문이다. 소예는 비를 탓하며 알바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전소예라고 해요.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끝의 다른 이름은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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