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우리가 처음 만난 날
19.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을 만나는 건 내게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어릴 적 거제도에서 살 때 내 세상은 현실의 내 주변에만 있던 게 아니고,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전국 각지의 친구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어릴 때야 마냥 멋모르고, 이담에 커서 어른이 되면, 그래서 서울에 가서 살면 이 친구들 다 만나서 여기도 놀러 가고 저기도 놀러 가야지, 라고 꿈꾸곤 했지만 그걸 나이 먹고도 심심찮게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여간 나는 좁고 답답한 곳에서 언제라도 벗어나 내 삶의 지평을 넓히길 늘 바랐으니까.
다만 나이가 들면서, 아니 경험이 점차 쌓이면서, '온라인에서 사귄 친구를 현실에서 만나는 것'에도 기준이 생기고 조심성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02년 연을 맺었던 친구들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내게 제 집 주소를 쉽게도 불러주었고 그렇게 펜팔을 시작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체 날 뭘 믿고 주소를 알려줬을까 싶지만, 그때에만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소셜 미디어에서 자신의 신상을 최소한으로 노출하라는 당부가 어디든 따라다닌다.
온라인 친구에 관한 일장연설로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 추억해보려는 이야기가 바로 현재 내 파트너이기도 한 라이언 Ryan을 어떻게 만났는가에 관한 회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알게 되었고 서로에 대해 사진과 공유하는 관심사만을 아는 채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고양이를 키우고 롱보드를 타는 백인 남자였고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동양인 여자였다. 조금 달라도 '보드'라는 관심사가 같아서 우리는 곧장 대화를 쉽게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쪽지를 몇 번 주고 받다보니 만날 약속을 잡는 것까진 일사천리였다.
9월 2일, 노동절에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캐나다의 노동절은 5월 1일이 아닌 9월 첫 번째 월요일이다. 2019년의 9월의 첫 번째 월요일인 9월 2일, 마침 휴일이었고 나는 학교 개강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우리는 다운타운의 컬리지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날씨가 좋으니 같이 보드를 타자고, 토론토 시내를 구경시켜주겠다는 명목이었다.
약속 시간은 1시였지만 대게 일찍 나가곤 했던 습관 덕분에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밥을 먹지 못하고 나왔지만, 만나서 점심을 먹고 움직이면 되겠지, 라고 대충 머릿속에 계획을 세워봤다.
라이언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커피숍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단번에, 아, 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보드보다 1.5배는 더 긴 롱보드롤 끌고 들어왔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가 내게 토론토 아일랜드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토론토에 발을 디딘 지 열흘이 좀 지난 신출내기는 거긴 뭐 하는 데냐며 열을 올렸고, 그는 웃으면서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하더니 거길 데려가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운타운을 누비기 시작했다.
노동절이라 시내의 큰 도로 몇 군데는 차량이 통제되어 있어 안전하게 시내 한복판에서도 보드를 타고 신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나를 씨앤 타워 근처로 데리고 갔다. 가까이서 본 씨앤 타워는 더 높았고 더 뾰족했다. 저긴 아마 한국에서 엄마 아빠가 날 보러 놀러 오면 같이 구경이나 가볼 만한 데겠거니, 자기는 토론토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느니,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했다.
토론토에도 해변이 있었다. 씨앤 타워를 본 곳에서 호숫가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니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설탕공장 옆에 있는 모래사장이라 슈가 비치 Sugar Beach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나에게 비치, 해변은 짠내가 나는 파도가 치고 갈매기들이 깍깍 울어대며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 혹은 편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기도 하는 곳이다. 하지만 슈가 비치는 내가 생각하는 해변과는 너무 달랐다. 우선 '바다'와 인접한 모래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짠내가 나는 파도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 호수에도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긴 했지만 슈가 비치는 어쨌든 그 규모 자체도 작고 아담해서 도저히 해변이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내 고향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튀어나왔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에게 한국 사람들도 모르기도 하는 거제도 이야기를 하려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고, 그래서 나는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런 건 비치라고 부르지 않는다며 웃었다.
두어 시간 보드를 타며 돌아다니다가 토론토 아일랜드로 가는 배를 타러 움직였다. 티켓을 사려고 할 때가 되니, 자신이 아까 커피숍에서 온라인으로 티켓을 구입해뒀으니 그냥 타면 된다고 나를 만류했다. 티켓 가격이 비싼 건 아니었지만 왠지 신세를 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페리를 타고 토론토 아일랜드를 향해 가는 시간은 1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호주 시드니에 있을 때, 종종 페리를 타고 맨리 비치 Manly Beach를 갔던 게 생각이 났다. 시드니에서는 주말이면 교통카드가 있으면 무제한 대중교통 이용이 가능했고, 페리 이용권도 거기에 포함이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어딜 나가지 않으면 손해일 정도였다. 호주에서 탔던 페리와 토론토에서 탄 페리의 다른 점이라면, 희미하게 풍겨오는 바다의 소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페리 위에서도 진짜 바다와 호수의 차이점에 대해 내 열변은 이어졌다.
토론토 아일랜드에 도착하니 도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지만 한적하고 여유로움이 금세 피부로 전해졌다. 섬 하나가 거대한 공원 같았다.
라이언은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섬에도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섬에 있는 집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정부로부터 집을 빌려서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갑자기 정부가 쫓아 내도 쫓겨 나가야 한다는 것. 비가 많이 오면 섬이 물에 잠기기도 한다는 것, 그럴 때 섬 거주자들이 뭍으로 대피하기도 한다는 것. 아마 인터넷을 뒤지면 어디선가 얻을 수 있는 재미있는 정보였겠지만, 현지인에게 이야기처럼 듣는 건 또 색다른 재미였다.
토론토 아일랜드에서 가장 손에 꼽는 장소라면 아마 토론토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물가일 것이다. 씨앤 타워를 중앙에 두고 도심의 복작복작한 건물들을 멀리서 조경할 수 있는 풍경. 밤에는 야경도 많이들 찍는다며, 그 야경이 그토록 로맨틱하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들었지만.
토론토 아일랜드 투어가 마무리가 되어갈 때 즈음에는 배가 등가죽에 들러붙어 있었다. 아침도 점심도 거른 채 신나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섬에서 나와 토론토 시내에 돌아왔을 때 해는 이미 진 후였고, 어둑해진 시내를 돌아다니다 마무리로 라이언이 좋아한다는 라멘 가게로 함께 향했다. 맛이 있었는지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허겁지겁 먹었고 그렇게 우리의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하루 한 나절을 내내 붙어 있는 동안 우리 사이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모르는 토론토의 이야기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여 풍성하게 대화를 이어갔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커다란 장애물 앞에서 나의 수다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이 날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상하며, 이제는 파트너가 된 라이언과 그날의 대화를 연장해갈 수 있을 줄 알았을까.
물론 지난 2년간 갖가지 우여곡절이 더 많았지만, 첫 만남을 상상하면 미소가 절로 떠올라 앞으로도 쭉 한결같이 이어지길 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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