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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18. 자유로운 여행자 2

by 희연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18. 자유로운 여행자 2


토론토의 여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하얗고,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하고. 습하고 찝찝한 느낌이 없는 청량한 여름을 처음 맛보고 나니,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같은 과 동기생 S의 추천으로 그와 함께 켄싱턴 마켓을 다시 방문했던 날이었다. 유명하다는 지미스 커피 Jimmy's Coffee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맛은 잘 모르지만 한여름 야외에서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소소한 해방감을 주었다.


2021년에 와서 2019년의 여름을 회상하면 아주 아득한 기분이다. 2019년 대부분의 기억이 흑백사진 같지만, 여름만큼은 시원한 푸른빛인데 그것조차 참 생경하다. 언제 다시 이런 여름이 돌아올 수 있을지 꿈같기도 하다.

새로운 도시에 처음 발을 디뎠다는 설렘에, 질리지도 않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덕분에 토론토에 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체중이 5킬로가량 빠지고, 얼굴엔 건강한 그을음이 올랐다. 잘은 몰라도 이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돌아다녀보나, 하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그 예감은 이상한 방향으로 적중했지만.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회장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동기생 S는 또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ROM - Royal Ontario Museum을 추천해주었다. 학생증이 있으면 매주 화요일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고 자신은 예전에 토론토에 왔을 적엔 연간 회원권을 끊어두고 심심하면 갔었다란 이야기도 해 주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어느 화요일 우산도 없이 길을 나섰다. 가 보고 마음에 들면 나도 당장에 연간 회원권을 끊어 볼 기세로 입장했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은 그 규모 면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서울에 있는 국립 중앙 박물관만큼 크진 않았던 것 같지만, 지하철 역에서 내려 비를 피하느라 곧장 건물로 들어가는 바람에 겉에서 크기를 가늠해 보지도 못했다. 전시장 입구는 약간 성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우아했다. 쭈뼛쭈뼛 학생증을 내밀고 전시장 내부에 들어가니, 고생대 생물부터 화석과 공룡 뼈 같은 것들이 연대기에 맞춰 전시가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는데, 실제 화석을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어리버리하며 두리번거리던 내 앞에, 자원봉사자 분이 실제 삼엽충 화석을 들이밀며 만져 보라고 말했다. 진짜 화석인지 여러 차례 물어보니, 환히 웃으며 진짜 화석이 맞다고 몇 번이고 대답해 주셨고, 놀라서 신기하다고 하니 이런 반응 때문에 자기는 화석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걸 즐긴다고도 했다. 동네 할머니처럼 보였던 그분은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는 걸 자랑하길 꺼리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화석에 대해 물어보면 화석 전문가가 되어 친절하고 다정하게 설명해주고, 장난치듯 아이들에게 화석을 던지는 시늉을 하는 것도 재미있어 보였다.


전시장 내부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구석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전시품들을 종이 위에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각자의 도구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서 혹은 서서,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전시품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어떤 사람은 화석을 그렸고, 어떤 사람은 공룡 뼈를, 또 어떤 사람은 여기저기 움직이며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재빠르게 스케치하기도 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도 이런 곳에 살면서 이 박물관에 매일같이 드나들고 저렇게 뭔가를 끄적인다면, 조만간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달 수도 있지 않을까? 우습지만 그런 상상도 좀 해 봤다. 이러다간 연간 회원권을 나가는 길에 결제해버릴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세상에 재미난 일은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지, 나는 배우고 싶은 게 왜 이다지도 많은지. 나이는 서른이 넘었는데 인생은 여전히 흥미진진했다.


또 다른 날.

정처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던 어느 날에는, 나도 모르게 발견한 지역 명물 건물이나 조형물을 만나면 두 배는 더 신이 나곤 했다.

토론토 시내의 랜드마크인 씨앤 타워 CN Tower 가 멀리서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걸 발견했을 땐 나도 모르게 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서울보다 작게 느껴지는 토론토 시내를 돌아다니며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래도 대도시고 캐나다에서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인 편인데 토론토 시내를 손바닥만 하다고 여겼는데 눈앞에 하늘을 찌르는 씨앤 타워가 등장하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앤 타워는 서울 남산타워와는 또 다른 위용을 자랑했다. 남산타워보다 더 높고 키가 커서였을까, 산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있어서였을까. 멀리서 보긴 했지만 분명 돈을 내고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면 도심을 내려다볼 수 있는 라운지가 있을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직은 거기까지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고, 다만 나중에 엄마랑 아빠가 놀러 온다면, 친구들이 한국에서 나를 보러 놀러 온다면 함께 가 봐야지, 하는 계획은 세워봤다.


빌딩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몸을 틀어 보니, 탁 트인 공간에 분수대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영문으로 토론토라고 쓰인 조형물이 분수대 한가운데 있었다.

토론토를 검색하면 거의 제일 먼저 뜨는 조형물이 아닐까 싶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여기가 토론토 시청 건물 앞이었다. 이곳은 겨울에는 이 물을 얼려 스케이트장으로 개장하기도 한다니 역시나 겨울의 나라 캐나다 답다고 할지.


계획이 없는 탐방은 즐거움이 많다. 물론 계획을 세우고 어디서 뭘 봐야 할지를 알고 간 다음 계획한 대로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 되겠지만, 나에게는 정처 없이 떠돌다 마주치는 낯설고도 진기한 풍경이 유명한 곳이었다더라, 하는 발견이 더 큰 즐거움이다.

자유로운 여행자의 영혼이 사그러들기 전에 어떻게든 즐겨야겠다는 마음이 활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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