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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17. 자유로운 여행자 1

by 희연

캐나다에서도 한번 살아보지, 뭐

17. 자유로운 여행자 1


중요하고 먼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한 다음 날, 그러니까 캐나다에 도착한 지 세 번째 되는 날 TTC를 타고 무작정 시내로 나갔다. 처음 겪는 토론토의 여름은 청명하고 더웠지만 바람이 불면 서늘했고, 이 기세라면 어디든 모두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지하로 들어가면 휴대폰 전파는 통하지 않았고, 열차가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면 간신히 전파가 통했다. 그 틈새에 빠르게 지도를 검색해서 어디든 가봐야겠다며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눈에, 켄싱턴 마켓 Kensington Market 이라는 곳이 들어왔다. 그래, 새로운 도시에 왔으면 그곳의 시장을 가봐야지. 오늘의 목적지를 정했다.

대충 컬리지 역 College Station에서 내려서 직선으로 쭉 따라 걸으면 곧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도의 축척을 간과했고, 동시에 구글 지도에서 알려주는 '걸어서 30분'이라는 표시에 현혹되었다. 내 체력을 과대평가했고, 토론토의 햇볕을 과소평가했다. 걸어도 걸어도 켄싱턴 마켓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걷기만 했다면 행군 길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행자 모드로 도시를 탐방하는 것은 결코 지치지 않는 즐거움이었다.

도시를 바삐 누비는 사람들, 독특한 모양의 건물들, 그리고 곳곳에 설치 미술처럼 풍경에 녹아 있는 눈요깃거리들이 나를 자꾸 붙잡았다. 가다 서서 높은 빌딩을 고개까지 꺾어가며 올려다보기도 했고, 주변의 경치를 만끽하며 걷다 보니, 더운 줄도 몰랐다.


그렇게 도착한 켄싱턴 마켓은 감히 '힙스터의 성지'라고 이름을 붙여보고 싶은 곳이었다. 토론토 시내 중심과도 또 다른 도회적인 분위기, 좀 더 자유분방하고 편안한 느낌이 골목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008년에 처음 갔던 홍대의 이름 모를 골목과 닮기도 했고, 2014년 시드니에서 종종 놀러 가곤 했던 뉴타운 Newtown과 비슷한 정취를 풍겼다. 왠지 예술가들이 많이 살 것 같은 동네였다.


그래도 오래 걸었다고 지치지 않았던 건 아닌지라,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갈 게 벌써 걱정이 들었다가, 불현듯 스케이트보드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부터 취미로 타던 스케이트보드를 토론토에서도 못 탈 건 없지만, 한국에서 타던 스케이트보드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고 왔던 것이 유일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해답은? 새 보드를 사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마침 켄신텅 마켓 안에는 롱보드 가게가 한 군데 있었다.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서 그대로 찾아갔는데, 근처를 얼마나 빙빙 돌았는지 모른다. 눈앞에 두고도 그 가게인 줄 모르고 오분 정도를 헤맸던 것 같다. 어떤 가게와 벽 사이에 있는 작고 하얀 건물에, longboard living이라는 글자가 박 힌 걸 발견하고서야 허탈한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가게에 들어갈 때까지도 어떤 보드를 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케이트보드를 여기서 사기엔 종류가 많을 것 같지 않았고, 기성 제품으로 바로 사서 가져갈 수 있으면서도 도시를 활보하는 데 무리가 없는 제품을 사고 싶었다. 전부터 롱보드를 갖고 싶단 생각은 했지만, 내가 주로 타는 용도와는 맞지 않아서 결정이 쉽지 않았다.

가게 내부에 들어가서 직원과 대화를 나눴다. 엊그제 한국에서 토론토로 왔으며 한국에선 주로 스케이트보드를 탔지만 지금 여기서는 롱보드나 크루저 보드 중 하나를 구입할까 한다, 하고 가벼운 수다로 시작했다. 직원은 무심하게 몇 마디를 툭툭 던져 주었고, 과도한 친절로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 수작질하지 않는 것 같아서 못내 고마웠다.

고심한 끝에 롱보드는 역시 들고 다니기에 무거울 것 같다는 생각에 크루저 보드로 결정을 했다.

보드를 구입하는 사이, 나보다 하루 먼저 토론토에 도착한 같은 과 동기생, S를 만나기로 급하게 약속을 잡았다. 교통카드 학생 할인을 받을 수 있는 학생증을 발급하는 걸 추천한다며, 학생 할인증인 포스트 세컨더리 카드Post Secondary Card를 발급받을 수 있는 셜본 역 Sherbourne Station에서 만나기로 했다. 새로 산 보드를 타고 도심을 가로질러서 걷는 것보다 더 빠르게 TTC 역까지 갈 수 있었다.


포스트 세컨더리 카드는 세컨더리 스쿨Secondary School,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한 후, 그 이후의(포스트 Post) 교육 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급해주는 카드다. 몇몇 지정된 어학원 학생을 비롯해 대학,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그리고 나와 같은 국제학생도 그 혜택의 대상이 된다. 신분증처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이 카드를 가지고 지하철 창구로 가서 학생 먼슬리 패스 Monthly Pass를 구입해서 더 저렴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주 4일 이상 학교를 다닌다고 가정했을 때, 버스를 하루에 왕복 두 번만 타도 한 달이면 충분히 뽕을 뽑고도 남는 금액이 된다.


하루 하나씩, 토론토에 익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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