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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Oct 22. 2021

아비투스 - 도리스 메르틴

아비투스

도리스 메르틴


아마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표지도 안 봤을 책을 읽었다. 낯선 단어, '아비투스'는 책을 읽는 내내 정체가 모호하게 느껴졌고, 다 읽은 후에 밑줄 쳤던 곳을 살펴보니 그제야 조금씩 눈에 다시 들어왔다.


P. 13. 아비투스란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를 말한다.


처음부터 아비투스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태도를 말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읽는 동안 왜 내내 헤맸을까. 쉽게 말해 아비투스는 '가치관'이다. 삶에 대해 개인이 가지는 판단 기준이자 태도로 직결되는 사고방식인데, 책 <아비투스>는 이 태도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고 기술한다.

당연한 얘기였다. 자기 계발서에서 흔히 말하는, '부자가 되는 가치관'을 가져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뻔한 내용이 이어졌다.


읽을수록 동의가 어려운 부분도 많고,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지점도 많았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내용도 많았다. 상류층과 중산층, 그리고 하류층으로 나뉘는 계층 분화, 그중에서도 상류층조차도 스스로를 상류층으로 인식하지 않는 모순, 돈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자와 비교하며 '겸손'해지는 사람들.

이 모든 게 사실은 아비투스로 결정된다고 하는 게 신선하다고 느꼈는데, 가치관이라는 우리말로 바꿔 이해하면 새로울 것도 없었던 것 같다.

돈을 더 많이 벌고자 하면 그만큼 위험을 무릅쓰고 돈을 좇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면, 돈을 아끼기보단 문화생활에 돈을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저자는 '아비투스는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읽는 내내 스스로 모순에 부딪히는 문장을 많이 보여주었다. 중산층에서 상류층이 된 사람들은 원래부터 상류층이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를 배울 수는 있어도 그 사람들 만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없다던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류층이 처음부터 갖고 있던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던가.

그래서인지 나의 결론은 자꾸만 "계급 타파"가 되어버렸다.

읽는 내내 '나는 부자가 되고 싶은가, 상류층이 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나는 내 삶에 만족을 하고 있고 어떤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싶은 열망까지는 없다. 하지만 나의 자식이라던가, 미래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길 바라는 가를 고민해보면, 적어도 내가 사는 삶보다는 나은 삶을 살면 좋겠다는 바람이 은근슬쩍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계급이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일까?


아비투스는 일곱 가지의 자본으로 나뉘어 서술이 되었다. 심리, 문화, 지식과 경제, 그리고 신체와 언어, 사회. 다른 것들은 아마 내가 지금 노력하면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지닐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다. 상류층처럼 생학하고 상류층의 문화를 즐기고, 상류층처럼 지식을 쌓고 또 신체를 단련하거나 언어를 다듬고, 상류층의 사회자본을 획득하는 것, 어렵겠지만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경제 자본'은 설령 로또를 맞더라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게다가 경제 자본은 다른 자본과 쉽게 배치가 된다. 즉, 경제 자본을 사용해서 문화자본, 지식자본 혹은 신체 자본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없으니 나의 한정된 경제 자본을 조화롭게 쓰는 게 중요하겠다는 생각과, 태어날 때부터 이 모든 자본이 거저 주어진 사람들의 삶을 비교하며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반면에 또 나보다 위의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위를 쳐다보며 자괴감을 느낄 테니, 이는 끝이 없는 열망일 것이다.


가진 것에 만족하며 행복해 하자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각자가 가진 것이 다르고, 바라는 것이 모두가 다르니까. 다만 다른 눈높이를 가진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는 것은 내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P. 273-274. 누군가 자신을 상류층 혹은 하류층이라고 말하는 순간 전형적인 꼬리표와 편견이 따른다. (중략) 중간 아비투스가 모든 사회 계층에서 이상으로 통한다.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중간에 있는 것이 가장 좋다.


저자는 마지막에 중용을 강조하며 끝맺음을 한다. 앞서 '상류층이 되는 방법'처럼 구구절절 늘어놨던 것과는 또 다른 결말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다시 찬찬히 보면 저자가 상류층 되기를 종용한 적은 없다. 각 계급 간의(주로 상류층과 중산층의) 아비투스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제시했을 뿐이었다.

이 책의 한국어 표지에서는 '최상층이 되기 위한 비법서'처럼 포장을 했지만 실상은 그런 자기 계발서와는 달랐다. 보다 현실적이면서도 사회를 통찰한 시선이 잘 담겨있던 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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