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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Sep 04. 2021

키르케 - 매들린 밀러


키르케

매들린 밀러


어린 시절 유행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에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리스/로마의 신들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그들이 입은 옷가지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거적떼기 천쪼가리 같은 거였지만 어쩐지 신이라고 하니 그런 옷마저도 고급스러워 보였고, 옷 바깥으로 드러난 근육들도 과장되어 보였지만 신이니까 그럴만하다고 생각들 정도였다. 여신들의 모습은 풍만한 가슴과 여리여리한 허리,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이 자랑인 듯 등장했지만 그들의 활약이라고 해봐야 대게는 바람둥이인 남편을 응징하기보다는 그 남편의 꾐에 넘어간 여성들에게 철퇴를 휘두른다거나, 무기력하게 지하 세계로 납치당해 끌려가는 등 참으로 보잘것 없는 모습만 있던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남신들이나 남자 영웅들의 모습은 좀 더 다양하고 인상깊게 등장했다. 악역인 모습마저도 다채로운 인간 군상의 하나쯤으로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그리스/로마 신화는 이제 유행을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실생활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연관된 단어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발목 뒤에 있는 아킬레스건부터 해서, 행성의 영어 이름들 역시 이 신들의 이름을 땄으니, 사실은 영향이 없을 수가 없던 게 아닐까.

그 신화 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던 여성 혐오의 영향력도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키르케는 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마녀라고 한다. 서양 문학 전체를 돌아봤을 때에도 최초로 등장하는 마녀라는 얘기가 있다. 17세기 유럽 마녀 사냥을 떠올려보면, 키르케를 마녀로 지칭한 이들의 속내에 어떤 혐오가 작용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읽었던 만화책에서 키르케의 모습은 사실 기억에 남아있진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주섬주섬 읽었던 키르케가 등장한 장면을 되짚어보니, 오디세우스의 귀환 여정 중 남자들을 돼지로 만드는 마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나의 사고는 거기서 그쳤지만, 매들린 밀러는 키르케의 생애를 깊게 파고들었다. 신화의 한 구석에 나오는 마녀가 아니라, 키르케라는 주인공을 중간에 세워두고, 오디세우스를 그의 삶에 지나가는 한 페이지로 만들어 버렸다.

관점이 바뀌면 시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매들린 밀러가 그려낸 키르케는 아주 입체적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조금 아둔하고 소심한 구석이 있었지만, 프로메테우스에게 마실 것을 건네주는 등 반항의 씨앗을 품고 있기도 했다. 처음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준 존재에게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신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주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가 그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다른 님프에게 분노의 화살로 돌려 괴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유배지인 아이아이에에 갇혀 지내며 자신의 마법을 하나씩 깨우치고, 신들은 절대 하지 않는 것, 반성이라는 걸 하게 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인간적'이라고 포장하는 수식어구를 많이 들었다. 유일신 신앙에서 그려지는 신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에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그에 비해 인간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힘을 너무도 제멋대로 휘두르곤 한다. 그 바탕에는 '반성'을 모르는 신의 한 성질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 218. 분노와 상심, 좌절된 바람, 욕망, 자기 연민. 이건 신들도 익히 아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죄책감과 수치심, 회한, 양가감정은 우리 같은 신족들에게는 미지의 나라와 같아서 돌멩이를 하나씩 세듯 배워야 했다.


키르케가 바라본 신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키르케 자신도 분명 아버지의 신전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된 시간,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 보내다보면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발자취 속 과오 역시 굽어보게 되는 법이다. 키르케에게는 그럴 시간이 충분했다.


책 곳곳에 인상깊은 장면이 많았다. 키르케가 인간 남자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던 사연이 소개되면서, 돼지에게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오디세우스 입장에서 바라본 그의 삶의 궤적 속 잠깐 등장하는 사악한 마녀이지만 오디세우스의 꾀에 넘어간 아둔한 면이 있는, 결국 '한낱 여자'에 불과한 키르케가 아니라, 오디세우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가 가진 능력치에 순수하게 감탄할 줄도 알았지만 그의 미숙한 부분도 알아차리는 영민한 여신이자, 훗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러 떠나는, 오디세우스보다 더 영웅적인 면모를 차근차근 보여주는 키르케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신으로 영원히 삶을 이어가기보단 자신의 진정한 본모습을 갈구하며 좇는 키르케의 인생 여정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 여성의 삶과 꼭 닮아있다고 느낀 건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미숙하고 영리하게 굴지 못했던 시절이 있다. 그 시기를 넘어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되는 시점, 그렇지만 여전히 부족한 그때가 되면, 내가 알게 된 것을 주변에 크게 외치고 싶은 때가 오기도 한다. 내 한몸을 불살라 모든 것을 태울 듯이 싸우지 않아도, 내가 나의 길을 잘 헤매며 헤쳐나가기만 해도, 여성의 서사는 그렇게 완성이 된다는 걸, 키르케가 몸소 보여주었던 것 같다.

비록 키르케처럼 비혼으로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은 없지만, 내 삶의 궤적도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단한 삶은 아니지만, 이렇게 버텨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은 페미니스트가 한 명 더 있다고, 키르케의 이야기에 곁들여서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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