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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ul 31. 2021

정치적인 식탁 - 이라영

정치적인 식탁

이라영


대학교 3학년 때 던가, 교양 수업에서 '정치학 개론'을 들었다. '정치'라고 하면 어렵기만 하고 내 삶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제 욕심 채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일견 당연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그러다 들었던 정치학 개론 수업에서 이 사고방식은 바뀌었다. 정치는 삶의 영역이고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인 존재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가령 식료품 구입을 하는 행위에서도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일들이 작용한다. 식료품 가게의 입지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물가의 변동까지. 어디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정치적인 식탁'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식탁이니 내 삶과 더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책에서는 식탁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 의제들이 속속들이 등장하면서,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조각처럼 떠돌던 정보들이 단정하게 정렬되었다.


P. 46 가부장제란 어머니의 밥으로 아버지의 법을 굴러가게 하는 제도다.


이 책은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과 동시에 읽기 시작해서 독서 효과를 더 톡톡히 볼 수 있었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에서는 자본주의와 여성의 노동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면, <정치적인 식탁>에서는 여기에 가부장제를 끼얹고 이 사회에 산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쟁점들을 곁들였다. 특히 위에 인용한 문장을 읽는 순간은 눈앞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가부장제가 지속이 되기 위해서는 아버지 - 가장의 권위가 드높아야 하고 이를 지탱하는 바탕에는 어머니의 돌봄 노동이 자발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머니가 밥을 차리지 않는 집안에서는 가장의 위신이 서지 않는 법이고, 가정 내에서 아버지의 법이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어머니의 가사 노동이 필수적이다.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 업무는 가족 구성원 중의 다른 여성의 책임이 된다.

너무 확고해서 구멍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가부장제는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같이 흔들리기 시작할 만큼 나약한 것이었다. 가장의 권위가 위협받기 시작하는 일은 가장이 가정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가져오지 못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어떻게든 살림을 꾸리며 가정을 지킨다. 오히려 가부장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더 힘을 쏟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1997년 한국을 덮쳤던 구제금융위기를 생각해보면, 가부장제가 어떻게 무너지기 시작했는지를 면면히 살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가부장제가 유령처럼 떠돈다. 아버지의 권력을 보며 자랐던 아들들은 아버지만큼 돈을 벌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버지 같은 가부장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한다. 어머니의 희생을 보며 자란 딸들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며 가정이 아닌 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부장이 필요 없는 삶을 꾸려나간다.


P. 211 차별의 잔재가 사라지는 모습을 때로 전통의 소멸로 받아들이는 씁쓸한 시선은 얼마나 흔한가.


가부장제를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여기는 여성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가부장제의 전통이 주는 권력의 맛을 놓지 못하는 남성은 어떻게 해서든 이 체제를 유지하고자 노력을 하고, 이는 페미니즘을 향한 반격으로 드러나곤 한다.

특히 요 근래 몇 년 사이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역풍이 더욱 거세진 게 피부로 와닿는다. 한국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만 보면 사실 처참할 지경이지만, 어쨌든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 동료들의 모습 또한 눈에 띄게 보이기도 한다. 인간에게 환멸이 났다가도 그런 동료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시 힘이 나기도 한다.


<정치적인 식탁>은 입에 관련된 이야기를 순서대로 꺼낸다. 먹는 입, 말하는 입, 그리고 사랑하는 입. 여성의 입이 중심이 된 적은 지금까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이 입을 모아 외치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앞으로 변화할 세상이 기대가 된다.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중구난방에 중심 없이 산만해지는 느낌이 있어 조금 아쉬웠다.






Copyright. 2021. 윤해후.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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