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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Jul 31. 2021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 정아은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 줄곧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아마 이 말을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했던 딸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드라마에서만 해도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엄마를 '미련한 곰' 취급하며 딸이 악을 쓰고 대드는 모습은 흔하지 않던가. 나도 경제력이 없는 엄마를 보며 한심하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페미니즘을 알게 되고 가사 노동이 저평가되었다는 것을 배우고, 심지어 맞벌이를 하는 부부 사이에서도 가사노동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 현상에 분개하면서, 엄마의 가사 노동을 돌이켜 살펴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평생을 전업 주부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본인이 아픈 날에도 가사 노동은 쉬는 날이 없었다. 어쨌든 씻기고 먹이고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는 한, 엄마의 일은 끝나지 않으니까. 아빠는 나이가 들면 회사에서 은퇴를 하겠지만, 엄마는? 엄마는 죽는 날까지 가사 노동에서 은퇴할 수 없다. 나도 내 남동생도 가족의 품을 떠나 각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엄마는 아빠를 돌봐야 하니까. 아빠가 없더라도 엄마는 자기 자신을 잘 돌보며 집을 꾸리고 살림을 하고 살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는 엄마가 없을 때 자신의 몫의 가사 노동을 하게 될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하게 '아무렴 가사 노동에도 임금을 지불해야지!'라는 생각 속에 자그마한 꼬리표로, '그 임금은 대체 누가 지불해야 하지? 가사 노동은 얼마나 잘했는지 확인할 지표가 없는데 무얼 기준으로 임금을 상정하나?'가 따라붙곤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몫을 다 하는 것은 제 입에 먹일 것을 스스로 벌어 쓴다는 것으로만 이해했던 나에게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측면을 짚어내며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가리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 노동/돌봄 노동이 여성에게 주로 전가되는 이유는 사회가 해야 할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의문의 꼬리표에 내 나름의 대답을 붙여볼 수 있게 되었다.


P. 77 경제학은 기본값을 철저히 '남성'으로 상정하는 학문이다. 뉴스에 나오는 주가 동향, 경제 전망, 국민 총생산 같은 공식적인 수치에 여성이 가정에서 행하는 노동이 배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식적인 역역에 여성이 하는 일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노동이 보이지 않게 되며, 그 노동의 수행자인 여성은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게 된다.


요즘의 흐름이나 동향이랄까, 여성도 자신의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게 보편적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까, 가사 노동을 전업으로 하는 여성에 대한 멸시는 쉽게 눈에 띈다. 맘충이라는 말도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선상에 있다. 파편적으로 알고 있던 정보들이 책을 읽으며 논리적인 연결 고리를 찾아가는 경험은 신묘하기 짝이 없다. 여성이 집에서 수행하는 가사 노동/돌봄 노동이 가시화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경제학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를 남성의 주체적인 경제 활동으로만 프레임을 짜 놓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순간에서부터 여성의 노동은 이미 보이지 않는 노동이 되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유 시장 경제를 멋지게 해석을 했다고 하지만, 그도 간과한 것은 그의 저녁을 차리고 그의 생활 전반을 돌보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나도 말로는 가사 노동에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야 하며 가사 노동도 노동이라고 외치는 사람이었을지언정 가사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진정으로 낮잡아보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 한 몸 건사하며 사는 삶을, 내 삶을 잘 돌보며 십몇 년을 잘 살아왔음에도 가사 노동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돈을 많이 벌어 타인에게 외주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에만 급급했다. 직장에 나가 회사를 위해 일하고 돈을 벌어오는 것이 멋진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파트너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내가 해야 할 가사 노동의 총량이 늘었고 가끔은 이에 짓눌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다. 누구도 강제한 것이 아니었는데, 심지어 파트너마저도 내게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줄곧 했는데. 이상한 의무감에 자꾸 몸을 놀려 집안을 청소하거나 밥을 짓고,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했다. 하나라도 하지 않으면 내 의무를 다하지 않은 이상한 찝찝함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이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나아졌다.

나아진 계기랄 대단한 일은 없었다. 다만 내가 집안을 돌보고 함께 사는 이의 식사를 챙기는 것이 아주 대단한 노동이라는 생각을 차근히 내 안에 쌓아 올렸고, 이 고된 노동을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애정과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감각, 그걸 타인의 강제가 아닌 나의 온전한 애정으로 수행한다는 자기 만족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현실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애정과 사랑을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에 쏟는 일은 잘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에, 그러지 않으면 이기적이라고 매도하는 사회적 압박 탓에, 온전한 마음으로 가사 노동/돌봄 노동을 자처할 수가 없다. 그런 마음이 들려면, 함께 사는 사람이 비슷한 비율로 가사 노동을 분배하고 있어야 할 텐데 통계를 아무리 뒤져 봐도 남성의 가사 노동이 여성의 가사 노동을 압도하는 자료는 본 적이 없다.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빠져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역시 자본가를 무찌르고 자본주의를 타파하여 건강한 사회주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구나! 성별과 관계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이라는 물질에 휘둘리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아직 완벽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본 적도 없고 건강한 사회주의 사회를 본 적도 없으니까 어떤 게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의 자본주의는 많이 뒤틀려있다는 건 확실했다.


P. 201 지구 상에서 한 줌도 안 될 화이트칼라 회사원들을 받치고 선 이 거대한 영토를 구성하는 것은 자연, 여성, 식민지라는 세 요인이다. 오랫동안 있는 듯 없는 듯 묵묵히 있었던 이 세 요인은 세기를 넘어가면서 서서히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여명기부터 근 300년 동안 계속해서 자신을 재생산해 무상으로 제공하던 요인들이 역습을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혹은 오히려 후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다면 그래도 어제보다는 내일이 더 괜찮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 책의 작가분에게는 특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부분이 몇 가지 있다. 나라면 결코 읽지 않을 책들을 손수 읽어 보고 그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정리해 알려주신 점, 그리고 책에서 비판해야 할 지점들을 조목조목 잘 짚어내 필요 없는 부분을 가감 없이 잘라내 버린 점. 어려운 책을 쉽게 풀어서 핵심 내용을 전달해 주신 점 같은 것들이 좋았다. 인용된 책 중엔 읽고 싶어지는 책들도 있었지만 아마 평생 가도 읽지 않으리라 작은 다짐을 한 책도 있었으니, 이렇게라도 그런 책을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하고 싶다.

전체적으로 다 좋았고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지만, 엄마랑 아빠에게 읽어 보라고도 권하고 싶지만, 솔직한 말로 고등 교육을 받지 못/안 한 두 분이 읽기엔 난이도가 있는 편이었다. 그 점이 가장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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