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 서브머린
이사카 코타로
이사카 코타로의 철 지난 신작 <서브머린>은 그의 옛날 작품 <칠드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철 지났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 발간된 2019년 11월엔 내가 캐나다에 있는 바람에 책을 구할 수가 없어 전전긍긍하다 올해, 2021년 1월이 되어서야 전자책이 발간되면서 드디어 나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이사카 코타로의 신작을 이제야 읽게 되다니. 그런데 표지를 보니 <칠드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문구가 나와있다. 내가 <칠드런>을 읽었던 게, 벌써 거의 10년 가까이 되었으니까 이제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과 '다행히 이것도 전자책이 있네'하는 반가움이 동시에 결제버튼을 누르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칠드런>을 먼저 읽고 <서브머린>으로 이어졌다.
곧장 이어 읽은 덕분에 두 책 사이의 시간 차가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두 책 사이에 놓인 12년이라는 시간은 글의 깊이가 깊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여전히 가벼운 말투로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진나이'라는 캐릭터는 그대로였지만.
<칠드런>에서는 미스터리 한 사건들이 이곳저곳에서 가볍게 등장하는 정도였다면, <서브머린>은 중심에 있는 주제 의식으로 더 무겁게 모여든다.
<서브머린>의 중심 화자인 무토는, <칠드런>의 에피소드에서도 화자로 등장했지만, 가정법원 조사관의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조사해야 하니, 가볍게 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의 상관인 진나이는 어떻게든 일을 대충 해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10년 전에 초등학생과 했던 약속까지 지키는 의외로 성실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범죄를 저지르고 그에게 조사를 받는 소년들은 그를 은근히 좋아하기까지 한다.
<서브머린>은 소년범죄, 더 크게 나아가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P. 274 악인의 목숨은 빼앗아도 된다고 쉽게 단언할 수는 없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나도 동의하고 싶은 지점이 있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인간은 똑같이 끔찍한 꼴을 당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자신만만하게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 / 서브머린
이 구절을 읽고는, 하지만 그걸 이렇게 책으로 썼는걸요? 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소리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만 같아서 놀라기도 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사형에 처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와 이어질 수도 있는 이 쟁점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다. 악인, 악인으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람, 악인으로 오인된 사람, 악인이 될 뻔한, 악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 과연 악인의 정의는 무엇인가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에서 히틀러 비유를 대기도 하는데, 눈앞에 히틀러로 자랄 아기가 있다면, 이 아이를 죽이겠는가, 하는 딜레마 말이다.
이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설령 타인의 목숨을 빼앗은 중범죄자에게도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다. 화자인 무토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작가의 생각처럼(혹은 작가의 생각이라고 내가 믿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런 범죄자들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수백, 수천 번을 생각하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내 생각을 말해야 할 때는 그런 마음의 소리를 감출 것이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부터 어쩐지 살인에 가담하게 되는 찝찝한 기분이 들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결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서브머린>에서 나름 귀여운 반전이 이어진다. 고민하는 소년범죄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이어지진 않더라도, 이 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조금 마음이 놓이는 반전이라고 하고 싶다.
자꾸만 범죄를 저지른 한국의 청소년들을 떠올리며 읽었다. 뉴스에 나오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 반성의 기미가 있는 이들, 성인과 같은 수준의 형량을 받는 혹은 그 나이가 안 되어서 가벼운 처벌로만 끝나는 이들. 나도 이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면 조금은 분노를 삭힐 수 있을까?
아니다, 불우한 사정을 가진 이들 모두가 죄를 짓진 않으니까, 그런 사정을 자꾸 돌아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성인들의 범죄보다 청소년들의 범죄는 다른 각도로 볼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어리니까 봐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해 보고 좀 더 사회에 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생각나기도 했다. 결은 많이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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