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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Oct 31. 2021

나는 엄마가 힘들다 - 사이토 다마키

나는 엄마가 힘들다

사이토 다마키


엄마에 대해 생각하면 '이제는 괜찮다'는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내가 좀 더 어릴 적엔 엄마가 힘들었다. 더 어릴 적 이래 봐야 불과 몇 년 전인 20대일 때지만.

엄마와 내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평범하게 자라 모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적당히 괜찮은 직장에 취직해서 돈 벌다가 적당히 내 처지에 맞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때가 되면 아이를 낳고 그렇게 남들처럼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이미 10대 때부터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다방면에서 튀어나온 못이었고, 어딘가에선 눈엣가시였고, 또 다른 곳에선 유별난 사람이었다.

유별난 나와 평범한 엄마는 필히 반목하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우리는 그런 운명이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웬걸, 나의 유별남은 난데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엄마에게 다 물려받은 거였다는 것을 깨달은 날엔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배신감보다 안도감을 먼저 느꼈다면 이상한 일일까.


아니다. 엄마는 나에게 이상한 기대감을 주었다가 그걸 산산조각 낸 나쁜 사람이었다. 그러니 배신감을 안 느낄 수는 없었다.

아빠 쪽 친척들이 명절에 모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차례상을 준비하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며느리들'이 몇 시간을 고생해 차례상을 준비하고 나면 남자 어른들은 점잖을 떨며 10분 남짓 절을 올리고, 그러면 명절 아침의 행사 일단락이 지어진다. 여자들은 차례상을 치우고 다시 상차림을 꾸린다. 아침을 먹을 시간이기 때문이다. 차례상을 올리는 데 이미 공을 들였으니 아침상은 조금 수월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자들은 남자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바지런히 움직여 음식을 상에 나르고 치우고 또 나르고 치워야 한다. 남자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뜨면 으레 남은 밥과 반찬으로 여자들이 요기를 한다. 이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엄마가 먼저 두 발 벗고 나섰다.

여자들도 절을 올릴 수 있게 하든지, 차례상을 같이 차리든지 해요. 막냇며느리의 당돌한 제안에 '형님'들은 머뭇거리며 거들었고 '아주버님'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차례 음식이 조금 간편해졌고, 직접 만들지 않고 사 온 음식들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식사 자리에 남자들 사이사이에 여자들이 끼어서 밥을 먹기도 했고, 식사가 끝난 남자들이 제 밥그릇 정도는 씻어두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를 페미니스트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엄마의 딸인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엄마의 배신은 잔잔하게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 엄마는 '여자가 더 배워서 뭐하냐'며 그냥 졸업하고 취직이나 하라고 했다. 엄마,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어?


P.127. 모녀 문제는 대게 딸이 엄마에게 느끼는 위화감, 답답함, 때로는 공포와 같은 감정으로 자각됩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반발과 분노로 직결되지 않는 상황이 딸의 고통을 가중시켜요. 반면 엄마는 자신의 모든 말과 행위가 애정에서 기인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그래서 딸의 고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엄마와 고통받는 딸인 셈이죠.


당연한 말이지만 엄마는 나를 사랑해서 그랬다. 그 사랑의 방식이 내가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으니 우리는 필연적으로 반목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엄마가 엄마의 엄마와 반목했었던 것처럼.

엄마는 복합적인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에 보면 누구보다도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 여자도 능력 있으면 결혼 안 하고 살 수도 있지, 내가 서른이 넘어가니 엄마가 어느 날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 그렇지만 자주 보수적이고 꽉 막힌 여느 엄마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손톱만큼 작은 엄마의 페미니스트적 면모에서 나는 커다란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러니까 엄마라면 내 삶의 어떤 모습이든 이해해주리라고 희망했던 것이다.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서로와 가장 가까이 붙어 시간을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엄마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여행 말미에는 '다신 엄마랑 단둘이 여행을 안 갈거야'하고 다짐을 했지만, 실은 엄마랑 더 자주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평생을 같이 살았음에도 서로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생을 더 함께 있어도 서로에 대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은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의 정신 병리 전문가인 남자 의사가 엄마와의 문제를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작품으로 풀어낸 다섯 명의 여성 작가들과 대담을 나눈 것인데 각자의 이야기 속에 나와 엄마의 이야기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인터뷰어가 서문에서 밝히는 대로, 모녀 관계는 보편적인 것이 없고 하나하나가 다 특수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지점이 많아서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와중에 엄마와 나는 어땠는지를 자꾸만 비교하면서 읽으니 우리 엄마 얘기를 구구절절 읊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우리 엄마는 이렇게나 이상한 사람이야. 그리고 그런 엄마한테서 나고 자란 나는 또 얼마나 더 이상한 사람이겠어.


엄마가 덜 힘들어진 까닭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내가 한국을 벗어나 캐나다에 온 것이다. 캐나다 오기 전에도 이미 떨어져 산 시간이 길었는데 그땐 애틋하지 않았다가 캐나다에 오면서 더 애틋해진 이유는 물리적으로 훨씬 더 멀어졌기 때문에, 12시간 이상의 시차까지 우리 사이에 놓여버렸기 때문이라고 짐작해본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엔 엄마랑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또 하지만, 붙어 있는 순간부터 나는 엄마가 지겨워질 것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영상통화할 때마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엄마, 보고 싶어, 사랑해.

엄마는 원래 그런 말을 낯부끄러워해 차마 화답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엄마도 이제 늙어버렸다. 주변에서는 딸과 함께 오순도순 사는 엄마 또래의 아줌마들이 많아진 것도 한 몫한다. 엄마의 바람대로 '평범하게' 결혼해서 사는 엄마 친구의 딸들과 그 딸들과 친구처럼 오붓하게 다니는 엄마의 친구들. 그래서 엄마도 이젠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딸내미, 보고 싶어, 사랑해.


우리는 너무 다른 것을 바란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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