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 옆에도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책을 읽은 후 이 작가를 꼭 만나고 싶다고 열망하게 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마 책을 읽기도 전부터 작가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책 속에 담겨있는 이반지하의 삶의 일부분에서 내 삶을 들여다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름, 이름, 나에게도 이름이 너무 많아.
필명 '윤해후'는 앞으로 책을 출간한다면 이 이름으로 출간하고 싶다고 홀로 정한 이름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쓰기 시작한 필명이었는데 브런치에서도 쭉 '윤해후'라는 필명을 쓰다 최근에 작가명을 본명으로 바꾸었다. 바꿀지를 고민한 건 좀 오래되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리고 이반지하의 토론토 전시회 협업을 주관하신 권혜안(HaeAhn Woo Kwon) 작가님과 만난 이후에 마음을 굳혔다고나 할까. 그냥 그렇게 됐다.
P.25. 주민등록의 이름 석 자를 쓰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나에게는 그랬다'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김소윤으로부터의 방어막 혹은 거리감이 필요했다. 김소윤은 '나'에 대한 여러 층위의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 때부터 젠더/퀴어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여성) 작가 어떻게 취급되는지는 충분히 보고 경험했고, 그런 일에 '본명'을 쓴다는 것이 두려웠다. 또한 김소윤으로 태어나 저절로 맺어져버린 관계들을 나는 절싫 외면하고 싶었다.
영어 이름으로 쓰는 '레이나Raina'는 필명보다 먼저 쓰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닉네임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영어 이름으로 이어진 건데, 레이나라는 이름은 '희연'이라는 이름이 가진 수치심으로부터 오래도록 나를 보호하는 보호막, 거리감이 되어주었다. 내 본명으로 연결된 가족관계가 끔찍했고 싫었을 때에는 더더욱 본명의 삶과 레이나의 삶을 분리시키기도 했다. 이제는 아주 오래 되어서 레이나가 희연이고, 윤해후고 레이나고, 또 희연이 윤해후가 되었다.
이름을 많이 가진 자는 자신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도 많이 한 자라고 생각했다. 정체성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낸 사람. 이반지하, 김소윤이 그런 사람이었고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그는 나를 닮은 것 같았고 내가 그를 닮은 것 같았다.
퀴어는 어디에나 있다, 당신 옆에도
벌써 몇 년도 더 전에 브런치에 내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고백한 글이 있다.
https://brunch.co.kr/@kimraina/150
오픈리 바이로 나를 호명하는 글쓰기를 한 것은 아마 이 글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이전에도 이미 그랬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바이임을 커밍아웃하기보다는 (그건 왠지 낯부끄럽기도 하고) 대화 중에 은근히 흘리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정체성을 드러내곤 했다. 전여친과 뭘 했더랬다라던가, 어떤 여자가 취향이며 어떤 남자가 취향인지를 설명한다던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알아서 나가 떨어졌고, 이런 내가 괜찮은 사람은 주변에 남았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 인물들은 성소수자 비율이 더 높다.
캐나다를 와서 가장 외롭다는 생각이 들때는 바로 그런 친구들이 더이상 옆에 없다는 걸 실감할 때였다. 퀴어함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그걸로 말장난하고 놀았던 그때를 생각하며 책을 읽었다. 아마 이반지하의 팟캐스트도 그런 느낌이었으리라 쉽게 상상이 갔다. 향수병이 도지려고 할때 쯤 책의 중반부에 도착했고 괴로워하며 읽기 시작했다.
바이처럼 - 개사/노래 이반지하 (원곡 꽃다지) 출처: 이반지하 유튜브 https://youtu.be/lDeZqcShQNQ
가정폭력 생존자와 정신병자.
한동안 술자리에서 술을 고사하며 했던 말이, "제가 정신병이 있어서 술을 마시면 안 돼요"였다. 기함하며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던 사람도 있었고, 안타까워하던 사람도 있었지만, 현대인은 모두 우울증 같은 걸 달고 사니까요, 하며 쿨한척 하던 사람도 있었다. 다 재수 없었는데, 같은 정신병자로 나처럼 약물 치료중에 있던 사람만이 말없이 공감의 눈길을 보냈던 것만큼은 좋았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의 3장이 그런 느낌이었다. 너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고, 그러므로 나는 너의 고통을 아주 잘 안다.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PTSD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당했던 가정폭력의 일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이야 부모님과 사이가 좋아졌다지만, 그때의 폭력들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아마 당시의 일을 끄집어 내서, 엄마, 아빠, 그때 그랬잖아요, 라고 한다면 십중팔구 대답은 "내가 언제?"라거나 "넌 뭘 그때 일을 아직까지 담아두니."라고 할 게 뻔했다. 내 안에도 아직 치유의 과정에 놓여있는 과거가 남아 있었는데 이 책이 트리거가 되어서 그 시간을 환기시켰다. '결국 어떤 과거는 결코 시제 같은 것에 갇힐 수 없음을 실감'(P. 122)하고 말아버린 것이다.
그 시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계속 되풀이하는 것 뿐이었다. 그땐 어땠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내가 무얼 느꼈더라. 되풀이하다보면 하도 많이 재생해서 늘어진 비디오 테이프처럼 바래진 과거 영상으로 남게 된다. 당시의 감정도 조금은 늘어지게 된다. 이반지하는 이 에세이에서 그런 작업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나의 작업을 해야한다는 숙제를 부여받은 느낌이었다.
P. 166. 처음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다들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반응이 많았다. 정신과 약이 독하고 한 번 먹으면 끊기가 어렵고, 아무개도 그 약 때문에 자살했다느니 어쩌고. 약을 먹어보니 무슨 말이 어떻게 퍼진 건지는 대강 알 것 같았지만, 나는 수면제를 먹고 나서야 난생처음 남들은 이렇게 잠을 자고 아침을 맞았나 싶어서, 배신감고 억울함에 몸을 떨었다.
맞아, 맞아. 나도 그랬어. 처음 정신과를 내원해서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 복용하기 시작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약을 먹고 하루만에 드라마틱하게 정신병이 나은 건 아니었지만, 수면제를 먹고 잠을 푹 자고 몽롱한 듯 하면서도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던 것만큼은 기적같이 느껴졌다. '남들은 이렇게 산다고?'라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그리고 정신과 약을 한 번 먹으면 끊기 힘들다는 말도 금세 절감하게 되었다.
정신병자마다 경우가 다 다르겠지만, 나는 의사와의 상담 없이 제멋대로 단약한 것이 가장 해로웠다. 다시 의사를 찾게 될 때마다 상태는 전보다 더 나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다 지나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잠을 못 이루는 밤이 종종 찾아오니) 충분한 상담과 약물 치료로 증세가 많이 호전되었고, 더이상 약물을 복용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사실 캐나다에 오느라 통원치료가 중단되는 바람에 '완치' 판정을 받은 건 아니긴 하지만.
그러니까 일단 어떻게든 살아보니까 나아졌다. 나는 그런 말을 해주고 싶어졌다. 가정폭력 생존자들에게, 그리고 각종 정신적인 문제들로 고전하는 사람들에게.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를 다 읽고 난 후에는 얼른 글이 쓰고 싶어졌다.
P.302. 글쓰는 거 무척 즐겁다. 글을 계속 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순간이 좋다. 생각이 글이 되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러다 내가 쓴 글에 발목 잡힐 날이 분명 오겠지만, 뭐 어떤가. 그때 발목은 이미 내 발목이 아닐 수도 있는데.
괴로웠던 3장을 다 읽고 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4장, 5장이 이어졌다. 편안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마구마구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꼭지들이었다. 영어의 대명사에 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많지! 라던가, '존나 씨발' 아 이거는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어, 남자애가 나한테 '여자는 그런 욕 하면 안 돼'라고 했던 그런 순간 말이지, 라던가.
생각들이 휘발되어 버릴까봐 황급히 빈 종이에 아이디어를 끄적여놨다. 조만간 메모했두었던 조각으로 글을 써서 발행하는 날을 상상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날, 토론토에 전시회 일정으로 방문한 이반지하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다. 전시회도 즐거웠지만 이반지하와의 만남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책에서 읽었던 모습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전혀 낯선 모습이기도 한. "멀리 캐나다까지 와서 왜 그렇게 다들 열심히 사니"라고 웃으며 말한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아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거 보면, 나도 이제 이반지하의 팬이 되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는 전자책으로 보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중간 중간에 이반지하의 작품 사진이 들어가 있는데 흑백으로 된 전자책으로는 그 사진의 구현이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책으로 읽었던 나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긴 했는데 휴대폰 단말기의 전자책 앱으로 화려한 컬러가 잘 드러나는 작품 사진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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