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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Nov 09. 2021

토론토에서 만난 이반지하

화장실 교실과 똥싸기 실패

한국에 사는 퀴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반지하, 그의 책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가 지난 7월 중순에 출간이 되었다. 독서모임에서 이번에 읽은 책인데, 책을 다 읽자마자 운명처럼 이반지하의 토론토 전시회 일정을 알게 되었다!


https://franzkaka.com/Bathroom-Classroom-week-1

권혜안(HaeAhn Woo Kwon) 작가님과 이반지하의 합동 전시였는데, 이를 위해 이반지하가 토론토에 직접 방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속해 있는 토론토 페미니스트 그룹에서 이반지하와 연락이 가능한 분이 계셔서 전시 관람은 물론이고 만남의 자리까지 주선해 주셨다. 코로나 이후로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회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 좋은 기회에 작가분들도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하니 안 갈 수가 없었다.

전시회 제목은 '똥싸기 실패(Failed at Shitting)'. 무슨 내용의 전시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토요일, 2021년 11월 6일, 설레는 맘을 안고 늦지 않게 전시장으로 향했다.

https://goo.gl/maps/BKNjsCWNGru5BAud6


전시장은 이미 사전에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작았고, 내부에 전시품이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시품 하나하나가 작가의 고민과 철학이 잘 드러나도록 배치가 되어 있고, 그에 따라 생각할 거리도 많아져서 의미 있는 관람이 되었다. 더군다나 작품 바로 옆에서 작가의 실시간 음성 설명을 함께 들으니 어렵다고 여겼던 현대 미술이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나에게 현대 미술은 늘 다른 세계였다. 작품 설명이 적힌 글을 읽어 봐도, 정말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도 했고 해설을 읽고 읽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을 맞닥뜨리면, "그래서 결국 그냥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거잖아?"하며 뾰루퉁해지기 일쑤였다. 목에 걸면 목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그게 내가 생각한 현대 미술이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너무 오랜만의 전시회기도 하고 공유하는 감성이 있었기 때문인지 마냥 어렵지만은 않았다.


1. From Hole to Hole

HaeAhn Woo Kwon and Ibanjiha(SoYoon Kim), From Hole to Hole

전시장 입구에서 오른쪽에 곧바로 보이는 전시물은 단번에 보자마자 '어, 요강이다!'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진 주전자는 자리끼를 담아두는 물주전자인가, 하고 생각을 했는데 전시품에 붙여진 이름 '구멍에서 구멍으로(From Hole to Hole)'을 보니 자리끼 주전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구멍은 위에서 들어가서 아래로 나오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거꾸로 매달았다. 나오는 구멍에서 들어가는 구멍으로 연결되는 것이 얼핏 불쾌하게 느껴지면서도, 입으로 똥을 싸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정도면 양호한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크게 보면 자연에서는 인간이 배설하는 것들까지 돌고 돌아 다시 인간의 입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쾌할 일도 없지 않을까.


2. Unsquattable Toilet and Unsquattable Toilet

HaeAhn Woo Kwon and Ibanjiha(SoYoon Kim), Unsquattable Toilet and Unsquattable Toilet

전시장에 바로 정면, 정중앙에, 한국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수세식 변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두 개나. 흰색 세라믹 변기와 붉고 검게 칠해진 변기가 누워있으니 우리는 여기에 앉아서 볼일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변기를 비추는 거울. 전시장 입구에서 거울을 보면 흰색 변기만 거울에 비친다. 변기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홀로 누워있는 것처럼 비치는 흰 변기는 외로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옆에 같은 처지의 친구가 있으니 조금은 덜 외롭지 않을까. 이반지하는 거울을 수치심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종류의 변기가 설치된 화장실이 한국인에게는 낯설지 않겠지만, 토론토에선 이런 변기를 본 적이 없어서 이상하게 반갑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땅에 파묻혀 있느라 본 적이 없는 변기의 다리 같은 부분이 드러나있어 기이함도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검붉은색으로 칠해진 변기를 보고서는 단번에 생리혈을 떠올렸다면 이상한 연상이었을까? 먹으로 칠했다고 하는 검붉은색 변기는 더럽다는 생각보다는, 생리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것 봐, 생리혈이 덕지덕지 묻은 변기를 좀 봐. 여성의 몸을 한 우리는 자주 보는 이 피가 너희에겐 낯설고 불결하니? 그렇다면 여기 와서 더 자세히 보렴. 남성의 몸을 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상상을 했다.


3. About This Item

Ibanjiha (SoYoon Kim), About This Item

한국 여자라면 모를 수 없는 벽이다. 그리고 그 아래 무심한 듯 떨어져 있는 카메라 사용 설명서.

벽에 설치된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공중 화장실에서 자주 목도하던 구멍들, 그 구멍을 막으려던 휴지조각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토론토에서의 전시이기 때문에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 설명서를 바닥에 두었다고 했다. 누군진 몰라도 카메라를 설치한 이가 무심코, 실수로, 자신도 모르게 흘려버린 사용 설명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최근에도 남자 교장이 불법 카메라를 설치해서 적발된 일이 있었는데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여성들의 안전한 공간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아서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토론토에 처음 왔을 때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고서는 적잖게 놀랐던 기억이 난다. 위아래로 휑하게 뚫려 있어서 어디서든 카메라가 쉽게 불쑥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초반에는 화장실 이용에 불안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국에서의 불안감이 남아있던 탓이었다. 그렇지만 금방 적응이 되었다. 화장실 어디를 둘러봐도 동그란 구멍은 없었다. 눈앞에 그런 구멍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안전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캐나다의 보통 시민 의식에 대한 신뢰도가 쉽게 쌓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캐나다에 오겠다고 마음먹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한국에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자꾸 늘어나기만 하는 여성 대상 범죄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고군분투하는 여러 사람들 덕분에 내가 떠났을 당시보다 지금의 한국은 더 나아졌다. 그러니까 위 작품과 같은 풍경도 이제는 하나의 도시괴담으로 남기만을 바란다.



4. Stuffed Rolls

Ibanjiha (SoYoon Kim), Stuffed Rolls

화장지는 깨끗하면서도 더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물에 젖어서 뭉쳐지면 그렇게 지저분할 수가 없지만, 갓 꺼내서 뽀송뽀송한 화장지는 깨끗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지 모른다. 두 가지 상반된 물성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걸로 화장지만 한 게 없다.


이 두루마리 휴지를 보면 학창 시절에 "휴지 좀 빌려줘"라고 하던 급우들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화장실에는 비치된 휴지가 없었고 학생들이 자신이 쓸 화장지를 각자가 마련해야 했다. 다른 학교도 그랬을까? 아무튼 나에게는 휴지를 "빌려"달라는 말이 참 우스웠다. 빌린다는 말은 빌렸을 때와 같은 적어도 비슷한 상태로 물건을 돌려준다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는데, 화장지는 써서 버리면 돌려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빌린다'는 게 성립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너도나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면 언젠가는 갚기라도 할 것처럼.

어떤 친구는 새 두루마리 휴지를 그대로 주면서, '갚았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그냥 영영 입을 꾹 다물었다.

나란히 줄지어서 서로가 연결된 듯 서 있는 화장지 한 줄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5. (좌) The Pissy / 6. (우) Squatty Face

HaeAhn Woo Kwon, The Pissy & Squatty Face

남자들은 아무데서나 흔하게 성기를 꺼내서 배설을 하곤 한다. 술집이 모여있는 골목이면 다들 한 번씩 느지막한 밤에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벽에 한 손을 짚고 선 채로 노상방뇨를 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들을 가진 엄마들은 한 번씩 경험해 봤을지 모르겠다. 아들이 사타구니를 잡고 오줌 마렵다고 하면 화장실까지 데리고 갈 게 아니라 한적한 풀밭으로 데리고 가 노상방뇨를 유도하는 것을. 혹은 그렇게 하는 어린 남자애를 본 적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여성의 배설은 좀 더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숨겨야 할 것이고 감춰야 할 것이었다. 일단 엉덩이까지 까고 앉아야 하기 때문에 야외에서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이건 마치 여성의 욕망은 감춰야 하고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곳은 벤치일지도 모르고 변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떠있는 곳은 오줌의 강이라고 했다. 여성이 배설물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던 때도 있다고 했다. 또한 여성이 '배설을 하지 않는 존재'로 포장된 때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을 둘러싼 창녀와 성녀 이분법 구조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전시회 제목은 <화장실 교실(Bathroom Classroom)>이었고 이반지하와의 콜라보 전시에는 <똥싸기 실패(Failed at Shitting)>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전시회장의 환한 조명과 흰 벽이 교실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작품 하나하나에서 화장실과 둘러싼 여성 의제 담론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교실이라는 이름이 붙는 게 자연스러웠다.


좋은 기회에 의미가 깊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전시는 2021년 11월 13일까지 이어진다. 토론토에 계신 분들이라면 전시가 끝나기 전에 꼭 가보면 좋겠다.






Copyright. 2021. 희연. All Rights Reserved.



*참고: 이반지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CV6s625tS-X/?utm_medium=copy_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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