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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Feb 24. 2020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권김현영 선생님과 한채윤 선생님의 토론토 강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권김현영 선생님과 한채윤 선생님의 토론토 강연



지역 독서 모임에 참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평소 거리낌 없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하는 편이라, 독서 모임에서도 망설임 없이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다. 그러자 모임의 한 여성이 내게 질문을 했다.

요지는, 자기 친구 중에 최근에 페미니스트가 됐다고 밝힌 친한 친구가 있는데, ‘탈코(탈코르셋 운동)’ 얘기를 하며 자신에게 ‘탈코’를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페미니스트가 다 그렇냐는 질문으로 이어져서는 나에게 ‘탈코’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지금도 내가 잘 대답을 했는지 확신이 안 서지만 그 당시는 이보다 적절한 대답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왔던 사람에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정말 달콤한 말이다. 그가 느꼈을 해방감에 나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아마 당신을 절친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느낀 해방감을 당신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사람마다 같은 현상을 보고 느끼는 게 다를 수 있다는 것과 페미니즘을 수행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걸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분명 그도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다 보면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성을 재고할 것이다.


2016년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을 계기로 한국 페미니즘에 다시 불이 붙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나일 수도 있었다,’는 공포감과 ‘그 피해자가 바로 나였다.’라는 동질감이 여성들 사이에 형성됐고 불길은 빠르게 번졌다. 양적으로 팽창하면 질적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페미니즘은 ‘분화’를 했다. ‘여성을 챙기’는 소위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다른 소수자와 연대하는 교차 페미니스트로 나뉘었다.

2008년 페미니즘 캠프에서 처음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 페미니스트로서 조금씩 성장했던 나는 이 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다양한 사람이 페미니즘을 공부하니 그중에 갈래가 생기는 건 자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왜 여전히 기존 남성 중심 사회관에서 정립한 성별 이분법에 따라 편을 가르고 진영을 나누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숙대 A씨가 트랜스젠더임을 밝히는 선언문에 조용한 지지를 보냈을지언정, 그를 반대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목소리에 반박하지 못했다. 어떤 말로 내 생각을 전할 수 있는지, 내 목소리가 들리기는 할지, 그래서 그들을 내가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2010~2012년도쯤 트위터 페미니스트로 겁 없이 여러 사람과 ‘키배’를 떴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모습이다.


우연한 기회에 토론토에서 권김현영 선생님과 한채윤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토론토에서 듣는 페미니즘 한국어 강연은 정말 반가웠다. 권김현영 선생님이 공저하신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와 <대한민국 넷페미사>를 읽은 적이 있어 강연이 특히나 기대됐다. 한채윤 선생님은 한국 LGBT 운동의 주축에 있는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강연을 듣는 건 처음이라 궁금하기도 했다.

강연은 총 2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한국의 대중화된 페미니즘 지형 읽기 – 두 번의 파국 이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셨고, 한채윤 선생님은 <지금, 여기, 혐오에 맞서는 성적 소수자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셨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강연에서 한국에 닥친 두 번의 경제 위기, 1997년 IMF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 여성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개괄적으로 설명하며 인터넷에서 확산된 여성 혐오와 페미니즘 리부트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 설명해 주셨다. 한채윤 선생님 강연에서는 한국 개신교의 발달사와 성적 소수자를 향한 억압 기제가 어떻게 발현됐는지를 이야기해 주셨다.

(좌) 권김현영 선생님 / (우) 한채윤 선생님

기억에 남는 부분 중 하나는, 권김현영 선생님이 설명해 주신 ‘토론의 기술’에 관한 것이다. 토론할 수 있는 주제와 없는 주제를 정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령 종교가 옳은지 그른지는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고, 국가에서 성별을 정정해준 사람의 성별을 두고도 토론할 수 없다. 즉 넘으면 안 되는 선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강연 후의 모임 자리에서는 더욱 유익하고 깊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하나의 의문이 풀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을 혐오하는 이유가 대체 뭐였을까. 그들은 왜 다른 소수자와 연대하기를 거부하고 돌아서게 된 것일까.

이들은 2016년 이후 부흥한 페미니즘이 여러 갈래로 나뉠 때, 피해자에게 강하게 동질감을 느꼈던 사람들이었다. 자신을 피해자화해 구조를 비판하기보다는, 더 강한 자신을 만들어 ‘피해자에서 벗어나기’를 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전히 피해자 자리에 놓여있는 사람들에게 ‘너 같은 피해자 때문에 내가 더 피해를 본다.’라며 피해자 혐오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건 아마 ‘나는 너보다 낫다.’라는 알량한 자존감이지 않았을까.

이들과 내가 ‘키배’를 떠서 이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는 No라는 대답을 얻었다. 인터넷은 이미 공론의 장 기능을 잃었고 사람들은 진영을 나눠 싸운다. 그 판에 끼어들어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된다. 이들은 내가 자기편인지 아닌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토론해야 한다면 최소한 양쪽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전제를 세워두고 그 선을 넘지 않도록 약속을 해야 한다. 그래야 더 나은 논의를 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은 세상이 찾아올까? 우리는 페미니즘을 통해 더 나은 논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최근 래디컬 페미니스트들 양상을 보며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 강연을 통해 조금은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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