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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May 22. 2019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괜찮아

1. 고등학교 후배 A가 고민 상담을 요청했던 적이 있었다. 요지는, 애인이 자기 연락을 피하고 만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절박해 보였고, 나는 조금 심드렁했다. "언니, 어떻게 하면 그 친구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요?" 하고 묻는 말에, 이미 떠난 마음은 잡을 수 없으니 너도 마음 정리를 하라고 말할 만큼 매정하지는 않아서 담담하게, 조금 기다려보자고 말하며 위로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A는 그 이후로도 나에게 종종 연애상담을 해왔다. 울고불고했던 그 애인과는 1년을 더 지지고 볶다가 결국 헤어졌고, 다른 사람과의 연애에 대해 상담을 많이 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 누구랑 사귀기 직전인데 사실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등등.

그러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삶에 바빠져서 소식을 모르고 지냈다가, 학교 동아리 선배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학생 때보다는 훨씬 더 길어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고, 동행이 한 명 있었다. A의 동행은 단정한 단발머리에, 몸의 곡선이 두드러지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A는 나를 발견하자 반갑게 인사하고는, 자신의 동행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언니, 이 친구는 제 애인이에요."


우리는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2. 대학생 때 연합동아리에서 만난 친구 B는 여자인 내가 봐도 "예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눈에 띄는 친구였다. 동아리 선후배, 동기 할 것 없이 남자들은 B의 옆에 서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B는 그런 남자들 앞에서 수줍게 웃으며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갯짓으로 의사표현을 겨우 해냈다. 몇몇 여자들은 B의 그런 모습을 '여우짓'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재밌게도 B는 동아리의 그 어떤 남자 하고도 스캔들이 나지 않았다.

B에 대한 애매한 그 첫인상은 동아리 엠티를 다녀온 다음에 뒤집어졌다. 여자들끼리만 방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는데, 남자들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던 B는 누구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우습고 더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기는 사실 남자가 싫다며, 동아리 선배 모 씨가 가까이 와서 말하면 입냄새가 나서 주먹으로 때리고 싶다는 둥, 후배 모 군은 자꾸 스킨십하려고 해서 거길 걷어차 버리고 싶다는 둥, 그동안 듣지 못한 속내 같은 걸 들은 기분이었다.

그 뒤로 B가 남자들 앞에서 하는 행동은 수줍게 하는 여우짓이 아니라, 더 이상의 접근을 불허한다는 '철벽'이라는 것이 명백히 보이기 시작했다. B는 여자 동기들과 잘 어울려 다니면서 동아리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많이 친해져서 따로 숙박을 잡고 놀러 가기도 했다.


여자 동기들끼리 엠티를 갔던 날, 술을 많이 마신 B가 나를 따로 불러 내서 도움을 요청했다. 나라면 잘 알 것 같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어보았다.


"나 좋아하는 여자애랑 자고 싶은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여자끼리는 어떻게 섹스 해?"


나는 당황해서는, 나도 여자랑은 해본 적이 아직 없어서 할 줄 모른다고 대답을 했고, B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매우 진지하게 놀란 표정으로 "그럼 너, 고자야?" 하고는 꺄르륵 웃기 시작했다.




3. 알바를 같이 했던 C 오빠는 나와 취향이 잘 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나만의 영화나 책도 같이 좋아했고, 대화를 해보니 아주 잘 통하는 데가 있었다. 그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우리는 이따금 알바하기 전에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출근하기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C 오빠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해서, 같이 알바하는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저런 남자 친구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썩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매너가 좋았으며 어떤 일이든 남을 시키기보다 먼저 나서서 해냈다. 나와 하도 붙어 다니니 나에게 사귀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지만, 당시에 나는 남자 친구가 이미 있다고 선을 그어 대답하기도 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출근 전에 C 오빠를 조금 일찍 만나서 커피를 마셨다. 나를 앞에 두고 내내 휴대폰 화면만 보며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길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원래 잘 웃는 사람이었지만 그날따라 행복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게 조금 재밌어 보이기도 했다. C 오빠는 자기가 요즘 썸 타는 사람이 생겼는데 말투가 너무 귀여워서 사랑스럽다며 내게 자랑을 했다. 그러더니 이 사람과 곧 사귈 것 같긴 한데 나보고 어떤지 한 번 봐 달라며 그 사람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내게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아이돌 뺨치는 미모의 남성이 강아지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애견 미용사 준비하고 있대, 강아지도 두 마리나 키우고. 말은 어쩜 그렇게 예쁘게 하는지 몰라."


짙은 눈썹, 크고 동그란 눈, 오똑한 콧날과 희고 맑은 피부. 내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 남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로 소리쳤다. 이 사람 완전 내 스타일인데, 오빠랑 썸을 탄다고! 오빠 완전 대박인데! C 오빠는 어깨를 으쓱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세 이야기에서 공통적인 부분이 하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A와 B와 C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A와는 관련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고 B에게는 나중에 물어보니 "한 줄 알았다"며 웃고 넘어갔다. C 오빠는 오히려 놀라며, "너는 알고 있는 줄 알았어!"라고 대꾸했다.


나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글이 하나 있다.

https://brunch.co.kr/@kimraina/150

위 글에도 밝혔듯, 나는 '오픈리'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정체성을 아무나 아무에게나 말하고 다녀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위에 나열된 세 가지 사연도 아웃팅이 되지 않을 수 있게 각색을 많이 거친 것이다. 저 글 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게.


커밍아웃이 필요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았다. 위의 사례를 살펴보면 사실 난 이미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커밍아웃했던 사람들을 생각해봤고, 내가 커밍아웃했던 사람들도 생각해봤다. 문득, 매번 새롭게 만나는 사람에게 "저는 양성애자예요."하고 커밍아웃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밍아웃이 필요 없는 세상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1) 상대방의 지정 성별로 성적 취향을 판단하지 않는 세상 = 편견이 없는 세상

2) 성적 취향/성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 금기시되지 않는 세상 = 서로 예의를 지키는 세상

물론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기 전에 "성적 취향/성 정체성으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선행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출처 : 서울 퀴어 문화축제 공식 홈페이지(http://sqcf.org/photo)


다가오는 6월 1일은 서울 퀴어 문화 축제의 핵심 이벤트인 '서울 퀴어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날이다. 매년 규모가 커지는 퍼레이드를 지켜보면서, 우리 세상은 어디쯤 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세 사례는 모두 내 경험담을 각색한 것으로, 아웃팅 소지가 있는 부분은 모두 다른 표현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위 글만으로 누구인지 유추하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사례 당사자가 읽을지 읽지 않을지 알 수 없지만, 제가 직접 "이거 너야"라고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조치입니다. 본인 이야기 같다면, 본인 주변 이야기 같다면 그건 아마 착각이거나 그냥 단지 비슷한 사례의 다른 사람 이야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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