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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Mar 30. 202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SF라는 장르에 대한 생각을 뒤바꿔 놓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편집. 처음 출간되었을 때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2018년 4월에 처음 김초엽 작가의 <관내 분실>을 서점 한 구석에 비치된 브로슈어로 만났을 때만 해도 그의 작품 세계에 이렇게 동화될 줄은 몰랐었다.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2020년 5월이 되어서야 그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었다. 그리고 2022년 3월, 읽었던 기억에 조금 흐끄무레해질 무렵, 이 책을 다시 펼쳤다.


<관내 분실>

제2회 한국 과학 문학상 대상을 받은 단편이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의 강렬함이 세 번째 읽었을 때까지 고스란히 느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하지만 어쩐지 처음 읽었을 때에도, 두 번째 읽었을 때에도,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로 읽었을 때에도 어김없이 울고 말았다.


P. 194.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그래도 엄마는 분실되었을까.


2018년과 2020년에 읽었을 땐,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다. 여성에게 누군가의 아내 혹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다른 이름이 마음껏 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2년, 지금 한국을 보면 자꾸 퇴행하고만 있는 것 같았다. 여성에게, 아이에게 인간으로서 설 자리를 점점 주지 않으려는, 혐오가 넘치는 세상.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세상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김초엽의 소설, <관내 분실>은 아주 먼 미래, 성별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해진 세계가 아니라, 아주 근거리의 미래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더 현실감이 있었다. 현재의 문제를 미래의 시간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공감을 얻기 쉬웠다.

사뭇 클리셰가 될 수도 있었던 서사가 (임신한 여성이 자신을 학대한 엄마를 찾아 용서를 구하는 서사,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나?), 그 배경이 미래가 되는 순간 아주 신선하고 참신하게 변한다. 그리고 미래에서도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 여성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과연, 네 번째 읽을 때에도 또 울게 될까? 그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관내 분실>이 대상을 받았을 때,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가작을 받았다고 했다. 빠르고 효율적인 것만을 좇는 인류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풀어내는 이 단편은, 어쩐지 까만 우주에 홀로 남겨진 사람의 외로움보다는 그 사람이 향하는 까마득한 미래가 더 사무쳤다.


P. 133.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폐쇄된 우주 정거장에서 하염없이 자신을 가족에게 데려다 줄 우주선을 기다리는 안나는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자신의 외로움의 크기를 제한하고 있었다. 천천히 자라난 외로움이 충분히 커졌을 때, 안나는 비로소 가족을 찾아 유유히 떠난다.

효율성 따지기를 좋아하는 지금의 인류가 우주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면 딱 이런 미래가 오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다.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아주 낯선 세계인데도 친근함을 느낀다는 것은. 이게 바로 김초엽의 소설이 가지는 힘이 아니었을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SF를 쓰는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유토피아를 그려본다. 이 단편에서 김초엽만의 유토피아가 드러났다. 유토피아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확인하는 절차로 '순례'를 마련했다. 그리고 순례를 떠난 이들 중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순례지는 지구다. 언뜻 폐허가 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래서 유토피아의 대척점인 디스토피아라고 판단하기 쉽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의 '유토피아'였다. 물론 질병과 다툼, 전쟁과 증오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와 중에 사랑하며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P. 37. 정말로 지구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곳이라면, 우리가 그곳에서 배우게 되는 것이 오직 삶의 불행한 이면이라면, 왜 떠난 순례자들은 돌아오지 않을까?


문득, 나는 '마을'에 온 지구인처럼 느껴졌다. 물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도 완벽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내가 살기에 열악하다고 생각했던 한국에 비하면 낙원의 경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구에 남은 인간들과 순례자들을 생각하듯, 한국에 있는 친구들을 생각했다. 떠날 수 없어서 남아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남기를 선택한 사람들도 있다. 현실에 절망하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이 많다.

불행만 있는 곳이라면 아무도 남으려 하지 않겠지만, 불행과 행복은 동전 같아서 그저 뒤집으면 서로를 확인할 수 있다.

세로로 세운 동전을 빙글빙글 돌리는 상상을 한다. 불행으로 넘어져도 다시 뒤집으면 그만이다.



<스펙트럼>

'벌새'를 찍은 김보라 감독이 <스펙트럼>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작년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대체 이 단편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 셈이지? 하고 의아하고 신기했는데, 다시 읽고 나니 영화화에 대한 기대감이 더 높아졌다.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범위의 색채는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 마치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서로의 마음이 닿지 않는 것과 같게 느껴진다.

<스펙트럼>은 언어가 다른 외계인과 조우한 지구인, 희진의 이야기였다. 소통할 수 없는 외계인을 만났을 때 오랜 시간을 들여 마음을 통하게 되는 이야기나 혹은 소통의 부재로 인한 분쟁의 시작을 다루는 이야기를 퍽 많이 봤던 것 같다. <스펙트럼>은 전자의 서사지만, 차분하고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것이 참 달랐다.

이 단편을 읽자마자 눈을 감고서 희진을 돌본 루이의 행성을 상상했다. 내가 볼 수 없는 색이 하늘에 겹겹이 쌓여있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행성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공생 가설>


P. 75. 류드밀라의 행성을 볼 때 사람들은 무언가 놓고 온 것, 아주 오래되고 아득한 것, 떠나온 것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닥터 후 뉴 시즌 1의 아홉 번째 에피소드 "The Empty Child"를 떠올리며 읽었다. 어린아이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어떤 외계의 존재. 아이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하기 위해 애쓰는 외계인.

그리고 그 외계 문명의 잔상이 어른이 되어서도 남아, 떠나온 적 없는 떠나온 행성을 그리워한다.

인류의 다정함, 선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파고드는 소설이었다. 단순히 외계 생물이 머릿속에 주입했다는 이야기로 끝이 아니라, 그 외계 생물이 주입되는 과정에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퍽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인간들 간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받는다는 희망적 메시지가 좋았다.



<감정의 물성>

우울을 형상화한 물건이 있다면.

우울증을 오래 앓아왔기 때문에, 차라리 내 우울이 물건으로 변해서 집어던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단번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울하지 않을 때에도 우울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을 나는 갖고 싶을까?

P. 158.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사실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답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떤 순간에는 내 우울을 쓰다듬으며 엉엉 울고 싶어질 때도 있을 테니까. 그저 한없이 우울 속에 가라앉고 싶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자의로 우울에 빠졌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물건이 된 우울이 아니라도 나는 이미 마음속의 우울을 일부러 꺼내 여러 번 쓰다듬었던 적이 분명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결론은, 그런 물건 자체가 없으면 좋겠다는 것으로 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개인적으로는 <관내 분실>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우주에 다녀온 이소연 박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단편이었다.

여성이라서, 아시아인이라서, 이소연의 행보가 하나하나 사람들의 눈엣가시가 되었던 것처럼, 이 단편에서 최초로 다른 우주를 향해 나갈 뻔했던 '재경'역시 여러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결과적으로 우주선이 폭파되는 바람에 그 우주선에 탑승했다고 알려진 이들은 순식간에 영웅으로 기화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명예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하려다 보니, 그렇게 한국에서 '열녀비'가 세워졌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우주선을 타지 않은 재경의 선택이 더욱 영웅적으로 느껴졌다.


P. 224. "내 생각에 재경 이모는 인어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

인간과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의 중간에 있는 이가, 유유자적 아무도 모르게 바닷속을 헤집고 다니는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인류가 우주에 대해 아는 것보다 심해에 대해 아는 것이 훨씬 적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분명 우주만큼 탐험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어가 된 우주 영웅을 상상하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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