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연 May 17. 2022

자해를 하는 마음 - 임민경

자해를 하는 마음

임민경


불과 2주 전, 아주 당혹스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세상의 온갖 불행이 모두 나의 것인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눈물이 안구에 몰렸다. 아주 사나워졌다가 아주 얌전해졌다가, 신이 나서 꺄르륵 웃었다가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그저 봄을 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치기도 전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끄집어냈다.

죽고 싶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끊임없이 자살을 꿈꿨는데, 늘 자해에 그쳤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해가 하고 싶었다.

이번에 피어오른 마음이 당혹스러웠던 이유는, 캐나다에서 평온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정신병이 다 나았고, 그러니까 다시는 자살 충동이나 자해 충동이 들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괴로운 날도 아닌 평범한 어느 날에, 다시 자살 충동이 일었다.

다행히도 정신병 치유 과정에 분명한 진전이 있었던 덕분에, 새 용수철처럼 단단한 회복 탄력성이 오래 지나지 않아 내게서 우울감과 자살 충동을 튕겨내주었다.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자살 사고는 사라졌다.


임민경의 <자해를 하는 마음>에는 자해를 하는/했던 사람들의 마음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과 회복의 이야기가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도 '회복'이라는 것이 자살 충동이나 자해 충동이 전혀 없어진 상태를 뜻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현듯 다시 나타난 자살 충동에, 나는 역시 정신병이 다 낫지 않은 걸까, 하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책의 이 구절이 참 위로가 되었다.


회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완벽한' 것일 필요가 없다는, 지금의 내 삶이 회복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강박이 사라졌고 마음에 평안이 왔다. 나중에 또 자살 충동이나 자해 충동이 들더라도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책에서 언급한 '최초 자해 시도 연령' '최초 자살 시도 연령'  청소년기를 꿰뚫어  것처럼 제시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자해는 중학교 2학년 , 그러니까 만으로 13세일 , 방의 불을 모두 끄고 책상 아래에 몸을 구겨서 들어간 상태로 커터칼을 가지고 손목을 그었던 것이다. 종이에 무심코 베인 손가락에 비명을 지르던 나는, 스스로 손목에 상처를 내면서 가느다란 선이 그어지고  선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며 어떤 희열을 느꼈다. 아마도,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에서 오는 희열이었을 것이다.  자살 시도는 고등학교 2학년 , 그러니까  16세일 , 역시 집에서, 같은 공간에서,  손목을 그었을 때였다.


시간만 다르고 같은 공간에 같은 방법을 취했지만, 나는 이 둘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다. 사실 당시의 괴로움 탓에 기억이 많이 날라가 버려서 모든 것을 또렷하게 생각해내지는 못하지만,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16살의 자살 시도는 정말 '죽고 싶다'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는 것만큼은 지금까지도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여러 번의 자살 시도와 자해를 반복했다. 스무살이 되면 더이상 안 하게 될 줄 알았는데, 했던 어느 날엔 싸이월드에 일기를 남겨두기도 했다. 공개적으로 누군가에게 말하지는 않더라도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날에는 (혹은 기록을 남기고 싶은 날에는) 울면서 일기장에 구구절절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생을 간파당한 기분을 자꾸 느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회복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감사하기까지 했다.


사회에서 자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 건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시선에게 반박할 나의 언어가 부족했었다. "관심 받으려고 자해하는 거지?"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괜히 자해같은 거 하지마." "그런 거 하면 멋져보인다고 생각하나봐." "많이 힘들었나봐. (동정하는 눈빛과 함께)" 나는 그 어떤 말에도 대꾸를 하고 싶지 않았고,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정리가 되지 않았기도 하고, 제대로된 관심이 아니라면 차라리 신경을 쓰지 말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자해를 하는 마음>을 읽으면서 그 시절의 내가되어 하나하나 그 시선들에게 나의 마음을 말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관심을 받으려고 자해를 했던 게 아니야. 죽고 싶어서 자해를 한 적도 있지만 죽고 싶지 않아서 자해를 한 적도 있지.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면 자랑을 했겠지? 힘들긴 하지만 너의 관심은 필요 없단다. 정말 나를 아껴주고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의 관심이 필요했어.


하미나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나에게 치유의 책이 되었다. 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다.


특히나 자해를 하는 데 '유익함'이 있고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 있다는 관점은 나에게도 꽤 흥미로웠다. 자해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마음에 과거의 나를 죄인 취급하던 마음을 좀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자해를 해보라고, 하라고 제안하거나 추천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없지만, 누구든 주변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책이 마음을 돌보는 데 힘이 되길 바랄 뿐이다.






Copyright. 2022. 희연.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 추혜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