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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연 May 30. 2022

트릭 미러 - 지아 톨렌티노

트릭 미러

지아 톨렌티노


강박적으로 갖고 있던 독서 습관 중 하나는, 책은 일단 펴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을 해야 하는 것, 그리고 한 권을 다 끝내지 않고 다른 책을 동시에 읽지 않는 것이었다. 벌써 3년째 이어지는 독서 모임을 통해서 두 번째 강박은 많아 고쳐져서, 한 책을 다 읽지 않고도 다른 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같은 시기에 두세 권의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트릭 미러>를 읽으면서는 첫 번째 강박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이 여러 개의 에세이를 엮은 책인 덕분도 있었지만, 미리 읽어보신 분들의 경고에 "이 책은 아주 어려운 책일 거야" 하고 지레 겁을 먹은 덕분도 있었다.

처음부터 읽다가 지겹고 지루해서, 너무 어렵고 이해가 잘 안 되어서 읽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는 조언을 따라, 목차를 살펴서 챕터 제목이 흥미로워 보이는 것을 위주로 먼저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읽은 것은 5장. 엑스터시, 9장. 결혼, 나는 당신이 두려워요. 였고 마지막으로 읽은 것은 2장. 리얼리티 쇼와 나, 3장. 언제나 최적화 중, 그리고 7장. 우리는 올드 버지니아에서 왔다. 였다. 결과적으로 흥미로운 도전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재밌는 것 먼저 골라 읽기'는 실패였던 것 같다. 제목이 재밌을 것 같아 골랐던 5장과 9장은 독서 모임 내에서 통렬한 비판을 받았고, 비교적 재미 없어 보였던 2장, 3장, 7장은 의외의 극찬을 받으며 마무리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감상도 비슷했다. 5장. 엑스터시에서는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는 약물 문화(?)를 페미니즘과 엮어서 풀어낼 줄 알았는데, 종교 체험과 연관성을 찾아냈고 한 시절을 풍미한 음악사(?)와 엮어냈다. 그 시절 그 동네에 살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나와서인지 공감하며 읽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그래도 종교적으로 황홀경을 느끼는 것과 마약을 통해 황홀경을 느끼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서술에서는 그럴싸한 여러가지 과학적 뒷받침이 떠오르면서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 써서 내도 되는 거야?'라고 놀랄 수밖에 없던 것은, 그래도 엑스터시는 미국에서도 불법 약물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암암리에 파티 약물로 다들 쓴다지만) 과거에 자신이 했다는 내용, 요즘도 종종 한다는 내용을 책에 써서 출간했다는 것이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P. 162. 성인 소설에서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언제나 트라우마가 맨 앞자리로 와야 한다. 소녀들이 강간을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해야만 비로소 스토리라는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만 같다.


<트릭 미러>의 전반적인 평은 '단어들의 무덤'이었다. 에세이마다 핵심적인 내용과 사회를 아프게 찌르는 비판들이 분명 존재했지만, 수많은 문장과 단어에 묻혀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요즘에 미국에서 먹히는 글쓰기가 바로 이런 것인가, 하는 혼란 속에서 귀중한 고찰을 찾아내려고 애쓰며 읽었다.

4장. 순수한 여자 주인공들에서 아동/청소년 문학에 등장하는 여자 아이 캐릭터와 성인 문학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차이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동/청소년 문학의 여자 아이는 용감하고 씩씩하며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데, 성인 문학의 여성들은 트라우마로 괴로워하거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처벌을 받거나, 혹은 종종, 아니 자주 강간을 당한다. 그게 아니면 사랑에 목을 멘다.

요즘 내가 소설을 쓰며 고민하는 지점 중 하나기도 하다. 여성의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이 '강간'이라는 건 이제 너무 뻔하고 시시하다. 그런 시련이 없어도 성장하고 발전하는 여성을 보고싶다. 그런 생각으로 어떻게든 여성에게 '강간'이라는 시련의 서사를 지우려고 한다. 설령 강간을 당했어도 그걸 시련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강인하고 단단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현대 문학은 빠르게 변했다고 생각한다. 현대 문학에서 여성들은 주체적이면서 다정하고, 냉정하면서도 어리석게 굴기도 한다. 고전 문학 속의 여성들보다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여성이 많아진 것이 썩 좋다.

4장에서 작가는 고전 문학을 읽으면서 자신이 이입할 수 없는 여성들을 열거한다. 특히 백인 위주의 문학이 많기 때문에, 백인이 아닌 자신은 이제 더이상 문학 소녀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부분이 안쓰러웠다.


각 챕터를 다시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며 읽고 싶어진 이유는, 단어의 무덤에 나도 함께 묻히지 않고 귀중한 통찰을 다시 짚어내고 싶은 탓이다. 하지만 아마 당분간은 다시 펴볼 용기가 날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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